▲ 가계빚의 상당부분은 의료비, 주거비, 교육비 등의 생계형 빚이다.
민보영
김씨는 식당 아르바이트를 더 자주 나가고 있지만 월세 25만 원, 이자 30만 원, 가스와 통신비 8만 원 등을 내고 나면 세끼 밥 먹는 것도 빠듯할 지경이다. 지금은 이자만 내고 있지만 앞으로 2년 후 원금까지 갚으려면 수입이 많이 늘어야 하는데 지금으로선 그저 막막할 뿐이다. 가끔 동사무소나 식당에서 월급을 늦게 주거나 다른 사정이 생겨 이자 입금이 늦어지면 대부업체 직원이 무서운 어조로 전화 독촉을 한다.
"핸드폰 벨이 울리면 깜짝깜짝 놀라는 버릇이 생겼어요. 동사무소 직원들이나 친구들이 눈치를 챌까봐 전화를 일부러 안 받을 때도 있어요."친구들은 김씨가 변했다고 말한다. 만날 때 마다 피곤하고 불안해 보인다는 것이다. 예전엔 웃고 떠들기 좋아하던 김씨였지만 빚이 늘면서 웃음을 잃었다. 친구들은 대학에서 일어난 일들을 얘기하기 바쁘지만 김씨는 그 속에서 소외감을 느낀다. 학원에서 요리를 배워 한식요리사가 되고 싶지만 그럴 시간도, 돈도 없다. 책이나 인터넷에서 조리법을 찾아보면서 '언젠가는…' 하며 쓸쓸한 마음을 달랜다.
식당일까지 마친 날은 밤 11시에 돌아와 쓰러지듯 잠자리에 들지만 한 푼도 줄어들지 않은 900만 원의 빚 때문에 잠이 잘 오지 않는다. 만일 그 돈을 못 갚으면 어떻게 될까. 주변 누구에게도 손 벌릴 형편이 안 되는 김씨는 '대출금을 못 갚아 사채를 얻었다가 신체포기각서를 썼다' 등 뉴스에서 본 무서운 얘기들 때문에 몸서리를 치기도 한다.
"조금씩이라도 원금을 함께 갚아나갈 수 있도록 이자가 낮은 서민금융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햇살론 등 서민금융, 서민에겐 '먹구름' 대출김씨의 신용은 8등급이고, 금융사에서 인정할 수 있는 정기적 수입은 동사무소에서 버는 70만 원 정도다. 기자가 이 조건으로 한 새마을금고에 문의하자 담당직원은 "제도적으로는 햇살론 대출 자격이 되지만 대출심사팀의 내부 기준에 따라 거절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신용등급이나 연소득 외에 4대 보험 가입여부나, 정규직·비정규직 등의 고용 형태, 대출금융사와의 거래실적을 종합적으로 평가해서 연체 가능성이 낮은 고객을 선별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햇살론 등 서민금융을 마련한 취지는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사금융보다 낮은 금리의 돈을 쉽게 쓸 수 있도록 해주자'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가장 필요한 사람에게 대출이 잘 이뤄지지 않고 있는 셈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김씨처럼 여러 금융회사에서 대출 받은 다중채무자가 지난 6월말 기준으로 380만 명에 이른다. 다중채무자들은 대개 신용도가 낮아 은행이 아닌 제2금융권이나 대부업체 등에서 대출받는 비중이 높다. 그만큼 높은 금리를 부담해야 한다. 개인신용평가회사인 코리아크레딧뷰로(KCB)에 따르면 금융회사 3곳 이상에서 돈을 빌린 다중채무자의 65% 가량이 5∼7등급에 몰려있다.
다중채무자의 상당수는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 대출을 받는 저소득층이다. 한국은행이 지난해 9월 발표한 '2010년 가계금융조사 미시데이터 분석자료'를 보면 소득계층 하위 20%인 1분위 과다채무가구는 빚을 얻은 목적의 48.8%가 생계형이었다. 전·월세 보증금과 결혼자금, 의료비, 교육비, 생활비 등을 위해 돈을 빌려야 했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도 병원비와 사교육비의 비중이 35.5%를 차지했다. 서민들의 파산과 회생 관련 상담을 해주고 있는 '경제민주화를 위한 민생연대'의 송태경 사무처장은
"서민들은 창업 보다 긴급한 병원비 등의 생활자금을 해결하지 못해 빚을 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지난해 9월 말 현재 우리나라 전체 가계의 대출과 판매신용(카드할부 등)의 합계가 900조원에 육박할 정도로 가계부채가 증가하고 있고, 이 중 상당부분이 서민층의 생계자금 대출이지만 공적 금융시스템은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한국금융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2010년 기준으로 저소득층의 생계비와 창업자금 등을 지원하는 서민금융제도가 미소금융, 햇살론, 새희망홀씨대출 등 23개나 되지만 자금의 한계나 창구에서의 대출거부 등으로 여전히 소외되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금융연구원 김동환 선임연구원은
"서민관련 대출제도는 다양하지만 중복, 편중되는 부분이 많아 사각지대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서민생계비 지원해주는 공적금융 마련해야전문가들은 대기업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으로 '부익부빈익빈'의 소득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생계자금이 부족해 빚의 악순환에 빠지는 서민들이 늘고 있기 때문에, 저소득층이 낮은 금리에 긴급대출을 쓸 수 있는 공적금융의 확충과 함께 기초 복지를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서민금융제도의 경우 가장 시급한 계층이 창구에서 거절당하는 일이 없도록 보완장치를 마련해야 하며, '긴급 구호'에 해당하는 빈곤층의 의료비나 주거비 등에 대해서는 무이자에 가까운 공적금융을 제도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기초 복지의 경우 공공임대주택의 확충 등 주거 지원, 대학 등록금 인하 및 무이자 학자금 대출 확대, 공공보육의 확충,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 등을 통해 주거, 의료, 보육 등에서 사회적 안전망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신용회복위원회 명동지점의 김상길 심사역은 "실직, 사업실패 등으로 고용불안과 생활고가 겹치는 상황에서 서민층들의 생계형 채무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며 "최저생계가 가능하도록 생계비 지원을 하면서도 대상자들이 일정한 소득을 가질 수 있도록 현행 제도를 손질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이상구 사무처장은 "우리나라에는 유일한 보편적 복지라고 할 수 있는 국민건강보험도 보장률이 62%밖에 되지 않는 등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복지제도가 너무 부족한 실정"이라며 "가계대출이 급증하는 것은 서민들의 교육비와 의료비 주거비 등의 부담이 너무 과도한 탓이 크므로 국가가 국민의 기본적인 삶을 일정부분 지원하는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강조했다.
여당의원이지만 현행 복지정책에 비판 목소리를 내고 있는 한나라당 강명순 의원(국회 보건복지위원회)은 "정부는 기초생활보장에 관한 청사진이 없고, 대통령과 국무총리는 이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이 없다"며 "정말로 서민을 살리려면 취약계층에 대한 통합적 대책이 나와야 하고 내년 선거 때도 사회보장제도 개혁을 두고 후보들이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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