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를 향한 애잔한 초혼의식

[서평] 최장집 외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

등록 2012.07.19 09:37수정 2012.07.19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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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시작부터 "자유주의는 애당초 진보적 이념"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책의 결론이기도 하다. 애초에 이 말을 하고 싶어서 만들어진 책이므로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그런데, 기억되는 모든 이념의 시작은 반동적이다. 하물며 혁명의 이념이었던 자유주의야 더 말할 나위 있겠나) 자유주의 이념에서 진보의 가능성을 찾고 이를 살릴 방안을 모색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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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 표지 ⓒ 폴리테이아

그런데 내가 책을 읽는 동안 지울 수 없었던 의문은 진보적 자유주의가 가능하다고 믿는 이들의 전제에 대한 것이었다. 즉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의 분리가 가능하다는 생각에 대한 반문이다. 저자들은 의도적으로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를 분리해 낸다.


"자유주의에 관한 가장 큰 혼란은 자유주의가 진보적인가 아니면 반동적인가에 관한 것이다. 이 혼란은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를 구분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 (42쪽)

왜 분리하는가. 경제적 자유주의는 이미 '실패'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19세기 후반 이래 끊임없는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자본주의경제가 '자본주의의 실패'라는 구조적 문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의 반동에 대한 비판도 모두 정치적 자유주의가 아니라 경제적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실패를 해소하기 위한 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44쪽)

이들은 이렇게 둘을 분리해낸 뒤 모든 허물을 경제적 자유주의에 뒤집어씌운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이로써 면죄부를 얻게 된다. 전문용어로 '털어줬다'고나 할까.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특정 이념에 있어서 정치와 경제가 언제부터 이렇게 쉽게 분리될 수 있었던가. 우리가 사회주의를 말할 때 그 정치제도와 경제제도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듯, 어떤 이념이건 정치와 경제는 몹시 뭉뚱그려진 형태로 혼재되어 있다. 거기서 정치제도와 경제제도가 구체화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경제적 자유주의가 좀, 억울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몇 백 년을 한 몸으로 공조했는데, 누군가에 의해 막무가내로 찢긴 것도 모자라 죄는 자기가 다 뒤집어쓰니, 당신이라도 억울하지 않겠나. 그러면 이들은 왜 이렇게 둘을 무리하게 분리시키면서까지 자유주의에 심폐소생술을 시도하는 걸까.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피라미드 형태의 사회구조를 떠받치고 있다. 우리는 종종 잊지만 자본주의 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의회주의 역시 피라미드 형태다. 이에 대한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자유라는 이데올로기가 작동한다. 경제적으로 '자유'로운 기업 활동,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언론 출판 활동… 하지만 사실상 구조를 변화시키기에는 그 위력이 턱없이 약한, 혹은 오히려 체제를 더 공고히 하는 데 봉사하는 '자유' 말이다.

이들이 이걸 몰라서 이 '허약한 자유'를 자유주의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생각하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 이들 역시 이 구조의 한계, 부작용에 대해선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모든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다수의 횡포나 의회의 타락과 같은 민주주의의 심각한 문제점이 자주 지적되지만 민주주의가 현실적으로 최선의 정치제도라는 데에 별로 이견이 없다." (43쪽)

'의회의 타락'. 하지만 이들은 이를, 자본주의에 그랬듯 '의회주의의 실패'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근거가 부족해서? 의회가 민중의 요구를 받아 안지 못하고 오히려 배반하고 있다는 것은 요즘 삼척동자들도 다 아는 사실이다. 나는 이들이, 시장 권력은 갖지 못했지만 의회권력은 갖고 있거나, 최소한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자유주의를 폐기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손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기 때문에, 자기가 그 권력을 얻어서 사회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이들의 바람처럼 자유주의가 정말 이 사회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사회적 자유주의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영미에서 널리 공감을 얻었으며 그 결과로 오늘날 영어 liberalism이란 말이 자유주의와 진보주의의 두 가지 의미로 혼용되고 있다. 이런 사회적 자유주의의 관점을 더욱 확대해 빈곤만이 아니라 불황과 실업, 독과점과 환경 파괴와 같은 시장의 실패 전반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의 경제 개입을 대폭 확대한 것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구미의 '복지국가'다. 이런 경제를 '수정자본주의'라고 부른다. 이런 진보적 자유주의에 반대하고 고전적 자유주의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미를 중심으로 구미에 등장했다." (45쪽)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사회적 자유주의가 널리 공감을 얻었던 영미는 현재 자유지상주의가 활개를 치는 신자유주의의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 성과라면 필자가 고백하듯, 고작 'liberalism'이란 영단어에 의미 한 줄을 추가한 정도인 거다.

널리 공감을 얻었는데, 왜 힘 한 번 제대로 못 써보고 존재감을 상실했을까.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 애초에 분리될 수 없는 것을 분리하고 그 일부만 떼어내 변화를 도모했기 때문은 아닐까. 본류의 큰 흐름을 무시하고 지류, 그중에서도 일부만 건드려 그 흐름을 역행하려는 시도는 본모습으로 되돌아가려는 힘에 의해 흔적 없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와 유사한 모습을 우리는 이미 4대강에서 보고 있지 않은가.

자유주의에서 진보의 불씨를 되살리고 싶어하는 필자들의 간절함은 애잔한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언제나 떠나간 사랑에 대한 집착은, 약간은 볼썽사납고 대체로 구저분하다. 횡적으로 평등하고 다양한 사회를 원한다면, 변종 자유주의가 아닌 다른 세계관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피라미드를 먼저 그려놓고, 기울기가 가파른 삼각형보다 좀 더 완만한 삼각형을 '진보'라고 말하고 싶은 거라면, 물론 자유주의도 진보일 수는 있겠지만.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

최태욱 엮음,
폴리테이아, 2011


#자유주의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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