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미술관' 강의를 시작하는 이주헌 서울미술관장.
허정윤
김향안이 아침을 꼭 먹으라고 한 것은 식사를 제때 하지 않아 약해진 몸이 쉬운 길만 선택하고 해이해진 마음에 자칫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팁을 많이 주라고 한 것은 일하는 사람 뒤에 언제나 가족이 딸려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기회와 유혹을 분간할 줄 알라고 한 것은 일의 성패가 결국 이 분별력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기회와 유혹을 분간하는 방법은 이것이 나에게만 이익이 되는지, 민족과 역사, 세계에 도움이 되는지를 놓고 보면 쉽게 분별할 수 있다. 단순해 보이는 세 마디 조언에 인간의 조건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 관장은 인간의 조건에 대한 깨우침을 주는 학문이 바로 인문학이라고 했다. 하지만 인문'학'이라고 해서 읽고 배우는 것만으로는 깊은 깨우침을 얻기 힘들다. 대신 그는 경험과 사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나 스스로 인간이 되기 위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사유하고 이와 관련된 삶의 경험을 쌓는 게 그냥 공부하는 것보다 인문학과 더 닿아 있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미술도 인문학의 중요한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미술작품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위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림을 통해 인간에 대해, 삶에 대해 많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감상하는 것입니다. 특히 서양 역사화는 인간에 대해 많은 깨달음을 주죠."동양에 없는 역사화가 서양에 많은 이유 역사화란 역사적인 사건이나 영웅의 일대기, 업적 등을 그린 그림이다. 역사화는 단순한 역사 주제를 넘어 보편적인 가치와 교훈, 영웅적인 모범과 덕을 주로 표현한다. 또한 역사화는 인간과 삶의 조건에 대한 풍부한 이야기와 통찰력을 제공한다. 그런데 동양에서 역사화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순신 일대기를 단원 김홍도가 그렸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역사화와 비슷한 수원행렬도 같은 의궤가 있으나, 이는 역사화라기보다 사실적인 기록에 가깝다고 이 관장은 설명했다.
"서양에서는 역사화가 중요한 장르였어요. 성경이나 나폴레옹과 관련된 그림이 매우 많은 점을 보면 알 수 있죠. 르네상스 시대 이후 역사화가 매우 중요한 장르로 발달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17세기쯤 장르에 위계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프랑스 왕립미술원에서 장르의 위계질서를 구분했어요. 물론 역사화가 제일 상위를 차지했지요. 가장 밑에는 정물화, 그 다음이 풍경화, 동물화, 초상화, 역사화 순서였어요. 이는 인간중심적인 서양의 사고를 잘 보여줍니다."오로지 신만 바라보던 중세 암흑기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 자체에 초점을 둔 르네상스 시대에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가지게 되면서, 그리는 대상이 가진 생명력으로 위계질서를 정한 것이다. 움직이지 못하는 대상을 그린 정물화를 가장 하위 장르로 보고 생명력이 가장 강한 인간을 최고 상위 장르로 보았다.
반면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에서는 인간의 모습을 그림에 많이 담지 않았다. 대신 무위자연의 모습을 화폭에 많이 담았다. 우리나라는 '인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연'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회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르를 꼽으라면 산수화라고 대답할 수 있다. 옛사람들은 산수에 대자연과 우주의 법칙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닌 우주의 법칙을 가진 풍경을 그렸다. 자연을 움직이는 에너지와 리듬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그 '기운생동'을 그림에 표현했다. 이에 맞춰 옛날에는 좋은 그림을 '뜻을 얻은 그림'이란 뜻의 '득의작(得意作)'이라 칭했다. 걸작이란 표현은 근대에 들어와서 생긴 이름이다.
"그렇다면 역사화는 사실만 그린 그림인가? 그건 아닙니다. 사실이 아닌 신화와 전설도 역사화의 일부에 속했어요. 보편적인 가치와 모범을 보여주고 영웅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역사화의 범주에 넣었지요. 역사화가 '히스토리 페인팅'(history painting)으로 불리다 '스토리(story) 페인팅' 또는 '내러티브(narrative) 페인팅'으로 변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역사화는 문학작품 중에서 서사시와 비슷해요. 스토리가 있죠. 역사화는 인간의 조건과 삶에 대한 풍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역사는 물론 정서적, 정신적으로 무언가 배울 게 있어요. 이게 바로 그림을 통해서 공부하는 인문학입니다."30대와 60대 미켈란젤로, 무엇이 달랐나이주헌 관장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을 보면 역사의 시작과 끝은 물론30년의 세월을 보내고 노인이 된 미켈란젤로 내면의 변화도 엿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