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하힐링캠프에 출연한 인디밴드'장기하의 얼굴들' 리더 장기하
SBS
언제나 만에 하나의 '미래'에 대비하는 현실주의자'서울대 엄친아'로 알려진 장기하는 "학벌 상관 말고 자신의 재능을 펼쳐라…"고 말문을 열고는 "그렇게 말할 생각은 없다"며 반전화법으로 깨알 같은 재미를 주며 학벌 중심의 한국사회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솔직히 서울대 타이틀로 과대평가되고 있는 면이 있는 것 같아 거품을 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려고 노력한다"고 말한다.
고교시절 음대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대학 진학 후 밴드활동을 할 수 있지 않냐'는 부모님의 설득이 '맞는 말 같아' 서울대 사회학과에 진학했다. 음악으로 먹고 살겠다는 그에게 친구들은 '그럼 졸업장은 필요 없는 게 아니냐'고 했지만, 그는 '서울대 졸업장은 탐이 나' 졸업할 수 있을 만큼만 공부했다. 또 음악 말고 앞으로 살면서 돈 버는 데 필요한 것은 영어밖에 없는 것 같아 영어공부만은 열심히 했다.
음악을 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부모님 밑에서 돈 걱정 없이 자란 그에게도 불안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않냐"며 툭 내뱉는 장난스런 한 마디에 그의 현실주의적 면모가 돋보인다. 낙관하지 않는 신중함이 지금의 '장기하와 얼굴들' 장기하가 있게 하지 않았을까?
위기도 기회로, 인생지사 새옹지마(人生之事 塞翁之馬)학부시절, 무작정 춤을 잘 추는 후배 두 명과 밴드 '아무래'를 결성했으나, 밴드 이름만큼이나 암울하게도 많이 알려지지 못했다. 하지만 장기하 특유의 독특한 발상으로 학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공연을 보러 오는 학생들에게 100원씩을 주며 관객을 유치했다. 이 공연에서 '눈뜨고 코베인' 멤버로 영입됐다.
이후 2년 동안 매주 홍대에서 공연했지만 안타깝게도 군에 입대해야 했다. '눈뜨고 코베인' 활동 중 자작곡을 쓰기도 했는데, 군 생활 중 '내가 만든 노래는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스스로 메인보컬이 되어 활동할 것을 계획, 제대 후 드디어 '장기하와 얼굴들'이 탄생했다. 밴드 이름을 짓는 과정에서 '장기하의 욕망', '장기하와 감자탕', '장기하들' 등이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고.
'장기하와 얼굴들'은 친구들과 작은 레코드사를 설립하여 소자본으로 수공업 소형 음반을 제작했다. 이후 록페스티벌에 참가하고, 또 그를 통해 방송 PD의 눈에 띄어 방송에 출연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상상할 수 없던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며 대중들로부터 열광적 반응을 얻어냈다. 찾는 사람이 너무 많아져 모든 직원들이 주말마다 CD를 구워대는 것이 불가능해 '싸구려 커피'는 1만2000장을 팔고 절판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눈뜨고 코베인' 드러머 시절, 하루 8시간의 고된 연습으로 국소이긴장증이 발병, 왼손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됐다. 이로 인해 더 이상 연주를 할 수 없어져 많이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이러한 시련들이 결코 나쁜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았다. '눈뜨고 코베인' 시절 군 입대로 인해 지금의 '장기하와 얼굴들' 결성을 결심할 수 있었고, 왼손의 병으로 인해 기타를 놓고 무대에서 보다 다양하고 재미있는 퍼포먼스를 구상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보다 좋은 결과를 이끌었다. 그야말로 인생지사 새옹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