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급 <일곱집매> 포스터.
연우무대
누구의 얘기도 제대로 들을 줄 몰랐던 ― <일곱집매>의 중심인물인 고하나의 말을 빌리면,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 스물 몇 살의 나는 무슨 할 얘기가 그렇게 많았을까? 나라가 포주를 자처했던 역사를 다룬 이 연극을 보러가는 길에 그 수업을 떠올리고 문득 부끄러웠다.
역사는 이전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우리는 그 기록을 통해 지나간 과거를 기억하고 지금, 여기의 길을 찾는다. 그런데 학교에서 배운 역사는 지배계급 중심의 기록이다. 그 역사에는 힘없고 소외당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없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사람들, 누군가의 기억에서 지워지는 사람들, 아니 아예 자신의 존재 자체마저 부정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간다는 측면에서 최근에 '구술생애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많아지는 것 같아 반갑고 존경스러운 마음이다.
이 작품도 이양구 작가가 오랜 시간 기지촌 할머니들의 삶을 취재하고 자료조사를 하는 중에 만난 연구자들에게서 동기부여를 받아 구상이 시작되었고, 그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와 구술생애 기록물이 어우러져 탄생했다고 한다(실제로 공연의 3막 하나와 순영의 대화는 연구자들의 기록물에 적힌 할머니들의 증언이 많이 활용되었다고 한다).
연극 <일곱집매>는 기지촌에서 살아온 여인들의 삶이 그 이전 역사인 종군위안부와 오늘의 여성 이주 노동자에 끊임없이 연결되고 있음을 떠올리게 하면서 우리 근현대사에서 점차 지워져가고 있는 여인들의 이야기를 조근조근 들려준다.
처음, 고하나는 솔직하게 그들의 상처를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어쩌면 자신의 상처를 골똘히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일 테다. 타인을 통해, 그의 상처와 아픔을 통해 나의 아픔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얼마나 행운인지…. 가슴으로 대화할 용기를 낸 하나에게, 역시 마음을 닫아걸고 남에게 곁을 주지 않던 순영언니가 용기를 내어 "내 이름을 실명으로 써줘요" 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가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순간 기지촌 여인들이 겪었던 아픔과 이야기들이, 그저 추상적이기만 하던 그들의 상처가 내게 살아서 다가왔다. 꽉 막히고 독단적이라 남에게 제 말 한마디 더 보태기에만 기를 쓰던 내게도 두루두루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것은 내가 살아온 날들과 여러 경험, 기억들이 만들어낸 좋은 결실일 것이다. 옛날에 아팠다는 흐느낌, 지금 고통스럽다는 절규, 자기 존재를 드러낼 수 없어서 상실감에 휩싸인 뒷모습. 밀려나고 배제되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과 거친 울음소리를 쉽게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나도 그 사람들과 별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도대체 다른 사람과 다른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들의 기호는 시시각각 변하고,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기준도 시대별로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예전에는 왼손으로 글씨를 쓰거나 밥을 먹으면 기를 쓰고 고쳐주는 어른들이 많았다. 그저 '재수 없다, 복 나간다'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이유도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누구도 왼손으로 글씨를 쓰든 밥을 먹든 뭐라 하지 않는다.
10년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청년 성소수자 육우당(술, 담배, 수면제, 파운데이션, 녹차, 묵주 여섯가지와 친구 삼았다는 뜻이라 한다) 추모기도회가 열리던 곳에 여전히 자신들을 드러내지 못해 사진촬영도 금지해야하는 성소수자들이 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힘센 세력들은 동성애를 처벌하는 법안까지 마련하여 세상을 더 시끄럽게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은 묵묵부답, 무심하게 흘러흘러 이 사건들을 떠나보내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나는 계속 찾아들어보려고 한다. 그런 아우성을 찾아가서 그냥 듣고 오는 일이라도 해보려고 한다. 그래서 그 모든 증거들을 마음에 담을 수 있는 데까지 담아 간직하고 기회가 올 때마다 다른 사람들과 나누려는 것이다. 그것이 아파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살아있는 증거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기도가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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