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보사 기자에게 '기자의 조건'이란...

등록 2013.05.25 16:31수정 2013.05.25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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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보사 기자 생활 1년 차. 많은 일이 있었다. 짧은 글 소식을 쓰기도 벅찼던 수습기자 시절, 열심히 기사를 써서 편집장에게 퇴고를 보면 빨간펜으로 죽죽 그이기 일쑤였다. 붉은 선으로 생채기를 입어 온 기사를 보면 마음이 쓰렸다. 그래도 그렇게 몇 번의 퇴고를 거쳐 지면에 실린 기사를 보면 신기하고 뿌듯했다. 내가 쓴 기사가 학교 전체를 변화시킬 순 없어도, 학생들의 의식을 바꿀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감정에 서서히 무뎌져 가고 반복되는 기자 생활에 지쳐갈 때쯤, 슬럼프가 찾아왔다.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대학에서 선거의 더러운 이면을 목격했고, 내가 상식이라 생각했던 것이 상식이 아닌 것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취재원들이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학보를 왜 해요? 그 힘든걸. 학생들은 관심도 없잖아요?'라는 독설 아닌 독설이 나를 더 지치게 했다. 급기야 '내가 아무리 열심히 취재하고 기사를 써도 학생들은 읽어주지도 않는데, 왜 일주일 내내 이 고생을 해야 해?'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나를 잠식해왔다.

또 학기 내내 신문 작업에 시달리다 보니 내 시간을 갖고 싶었고, 학업에 좀 더 집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학년도 학년인지라 취업 걱정에 시달리기도 했다. 기사를 쓸 의욕은 이미 상실한 상태였다. '학보를 그만둬야 하나'하는 생각을 하루에도 열두 번씩 했던 것 같다. 그야말로 학보에 애정이 뚝 떨어진 상태였다.

지독했던 슬럼프는 나를 3주 동안 괴롭혔다. 예상외로 슬럼프가 길어지자 보다 못한 친구가 나에게 넌지시 한 마디 던졌다. '넌 그럼 도대체 왜 학보를 하는 거냐?' 그러게. 힘들다고 주변에 온갖 투정은 다 부리면서, 나는 왜 학보를 놓지 못하는 걸까? 친구의 말에 어떤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이유를 찾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모든 것을 놔 버릴 것 같았다. 수십 번 방황하다, 처음 학보사에 들어왔을 때 내가 마음에 새겼던 '정론직필(正論直筆) 하는 기자가 되겠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제야 머릿속을 가득 메운 안개가 걷히고 빛이 쨍하는 느낌이 들었다. 거창한 이유도 아니었다.


학보 기자를 선택한 건, 다른 누구의 시선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나 자신의 결정이었다. 나는 미련하게도 타인의 평가에 쫓겨 스스로를 슬럼프로 밀어 넣고 있었던 것이다. 기자로서의 사명감을 잃었으니 좋은 기사가 써질 리 없었다. 여러 날 고민했던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답은 간단했다.

학보와의 길었던 권태기에 끝이 보였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에 빗대어, 나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갔다. 고맙게도 학보는 너무 오랜 시간 방황한 못난 기자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나는 그런 학보를 여전히 사랑하기로 했다. 정당하고 이치에 맞는 의견과 주장으로 사실을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하겠다는 나만의 방식으로 말이다.


무릇 기자는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이성을 동시에 지녀야 한다고 말한다. 부조리한 현실에 분노해야 하지만, 이성적으로 사실을 바라봐야 한다. 내가 지독한 슬럼프를 겪었던 이유는 단지 뜨거운 가슴만을 가지고 달려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는 차가운 이성을 배울 때가 된 것 같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한림학보> 5월 27일 지면에 게재되는 글입니다.
#대학 #학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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