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드무하전 표와 큐레이터 MP3성인은 12000원, 청소년은 10000원, 어린이는 80000원이다. 기계 대여료는 3000원.
이소연
지난 16일,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알폰드 무하 : 아르누보와 유토피아展>을 관람했다. 전시가 시작되기 전인데도 예술의 전당 입구부터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하지만 막상 전시장에 들어서고 나니 그 많던 인구는 모두 일본의 <스튜디오 지브리 레이아웃展>을 보러 온 사람들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관람객들이 많지 않아 전시를 편하게 보게 되어 기분이 좋으면서도 묘하게 서운하기도 했다. 상업예술을 하는 작가의 전시도 이렇게 한산한데 다른 순수예술 작가나 예술가들은 얼마나 외면받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전시가 시작되고, 나는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전시는 크게 여섯 가지 섹션으로 나눠져 있었다. 나는 그 여섯가지 섹션을 하나하나 따라가면서 나는 무하의 예술적, 철학적 신념과 그의 삶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1. 파리의 보헤미안이곳에서는 무하의 초기작들을 볼 수 있었다. 무하는 체코에서 태어나 뮌헨과 파리에서 정식으로 미술을 배웠다. 초기작들임에도 불구하고 완성된 드로잉과 탄탄한 기초가 돋보였다. 그는 프랑스에 머물며 그의 그림을 마음에 들어 하던 어느 귀족에게 후원을 받던 중 갑자기 후원이 끊기고, 그 이후부터 상업예술 전선에 뛰어들게 되었다.
그러던 중 프랑스의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에게 영감을 받고 '지스몽다' 포스터를 그리게 되었다. 그는 '여성'을 소통의 매개체로 이용하였다. 그리고 그 포스터는 대중들과의 소통에 성공하고, 엄청난 인기를 끌며, 그를 성공으로 끌어들였다. 사라 베르나르에게서 온 영감과 감각은 곧, 그의 독창적인 '스타일'로 발전되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초기작들 중 사라 베르나르의 연극 포스터 '연인들'의 선과 색감이 마음에 들어 엽서로 구입하기까지 했다.
또한 그가 왜 굳이 석판화를 사용하였는지도 고민하다가 석판화의 특징에 대해서 검색을 해 보았다. 상업예술가고, 포스터를 그려야 하는 그로서는 판화 작업은 필수였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석판화였을까. 그건 석판화의 특징을 알고, 무하의 사진을 조금이라도 본다면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석판화는 요철이 없이 물과 기름의 반발원리를 이용한 판화로, 농담효과가 가능하고 선이 자유롭다. 풍부한 색감과 자유로운 곡선이 강점인 그가 석판화를 이용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2. '무하 스타일'의 창시자 '스타일'이라는 건 무엇인가. 나도 소설을 쓰는 학생으로서 내 '스타일'을 무척 갖고 싶었고, 자신의 색이 뚜렷한 작가나 친구들을 보면 부럽기만 했다. 알폰스 무하는 이러한, 자기만의 '스타일'을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이었다.
사라 베르나르에게 꽂힌 그는 지스몽다 포스터로 성공을 이끌어낸 뒤, 자기 스타일을 다듬는 데에 총력을 기울인 듯했다. 그의 작품에서는 아라베스크 문양의 곡선과 머리카락, 아름답고 풍만한 여성들이 등장한다. 그건 '아름다움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마련이고 그것은 곧 삶의 질을 높이게 될 것'이라는 그의 예술철학과도 잘 어울렸다.
나는 특히 '하루의 휴식'이라는 작품을 인상깊게 봤다. 하루의 순간순간을 긴 화면 안에 아름다운 여성으로 그려넣었는데, 그 생동감과 풍부한 빛깔이 놀랍다. 그리고 그 순간들을 합친 하나의 작품은 인생을 표현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들게 했다.
3. 코스모폴리탄국제적 유명인이 된 무하는 전 세계적으로 더 활발한 작품활동을 벌였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와 미국에서의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 뉴욕 데일리 뉴스는 그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장식 예술가'라며 극찬했다. 파리 만국박람회의 여러가지 프로젝트도 인상깊었다. 새로운 트랜드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작가로서의 명성과 업적은 다 쓰지 못할 정도로 엄청나고, 아름다웠다.
4. 신비주의자내가 어릴 적, 아버지는 날 앉혀 놓고 어려운 이야기를 종종 해 주었다. 그 중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는 '너만의 철학을 가져라'였다. 내가 그 말을 이해하기까지는 꽤 오랜 세월이 걸렸다. 그렇다면 무하의 철학은 무엇이었을까. 섹션4 신비주의자에서는 그가 매료된 신비철학과 그에 영향을 받은 작품들에 대해 볼 수 있었다. 나는 '앵초와 깃털'이라는 작품을 인상 깊게 봤다. 시적 주제를 한 화면에 표현해낸 것이 좋았다.
또한 그는 19세기 말 예술가들과 함께 영성론에 빠지고 '신지학'모임과 '프리메이슨'조직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것들은 '자유와 양심' '인류와 진보'를 주장했다. 물질적 세계의 표면적 모습 너머 깊은 진실을 추구하고자 했던 그의 유심론은 수많은 걸작들을 내놓았다. 다른 방면에서 보자면 사회 정치적 문제에 대한 반응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5. 애국자애국, 하면 우리도 할 말이 많다. 나는 이 섹션을 둘러보며 그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식민 지배 아래에 있던 체코. 일제 아래에 있던 한국과 멀고 먼 나라지만 그 서러움과 울분만큼은 닮아 있었다.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고 주된 활동을 했지만 그는 자신의 뿌리를 언제나 잊지 않았고, 조국을 위해 수많은 작품을 바쳤다. 그 중 단연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작품은 '슬라브 서사시'다. 습작밖에 보지 못해 너무 아쉬운 작품들이었다. 제대로 완성이 되었으면 정말 엄청난 걸작이 되었을텐데. 그러나 흐릿한 데생과 선들 속에는 조국을 향한 애정과 범인류애적 평화를 향한 갈망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나는 '모라비아 교사 합창단'이라는 작품이 좋아 엽서로 남겼다. 죽은 사과나무 위에 앉아 검은 새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소녀. 전통의상을 입은 소녀는 민족성을 뜻했고, 죽은 사과나무는 불운하고 절망적인 현실을 말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 소녀의 표정은 발랄하고 생기 넘친다. 그것은 희망과 포기하지 않는 싸움을 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6. 예술적 철학가'러시아는 반드시 회복한다' 이 문구를 읽었을 때, 눈물이 날 뻔했다. 그 강렬하고 명료한 한 문장은 조국을 향한 그의 애정을 한 눈에 보여주었다. 일부러 세계적인 문자인 라틴어를 사용한 무하의 섬세함에 또 감탄했다. '황야의 여인' 또한 시리도록 아픈 그림이었다.
식민지배를 받는 체코인들의 무력감과 슬픔이 고스란히 베어나왔다. 나는 뒤에 있는 샛별 하나가 희망을 뜻한다고 생각했고, 그가 절망을 그리면서도 언제나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걸 죽은 아이를 안은 농민 여성 그림의 눈동자에서 나는 볼 수 있었다. 인류를 향한 희망적 메시지를, 그는 갈망해왔던 것이다.
애국자이자 여행자, 작가, 화가였던 그는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넘어선 하나의 장르를 개척했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 인류에게 희망적 메시지와 아름다움을 통한 행복감을 선사하였다. 이곳에 담은 감상과 작품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꼭, 반드시 이 글을 읽은 사람이라면 알폰스무하전을 보러 가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희망과 행복을 나누고 싶은 필자의 작은 소망이라고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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