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함께 맑은 공기 쐬러 나간 날, 나는 뜻밖에 이야기를 듣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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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순에 접어드는 아버지가 야윈 몸을 휠체어에 싣고 산책을 나서던 날이었다. 아버지는 가벼웠다. 휠체어는 힘들어하지도 않고 스르르 굴러갔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통발 지게에 흙더미를 가득 지고 지리산 자락 작은 골짜기를 메우며 밭을 개간하던, 그 누구보다 강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노동의 고됨에도 스스로에 대해 항상 엄격했던 당신이었지만, 세월 이길 장사는 없다는 말을 증명하듯 뼈마디가 앙상한 노인이 됐다. 아버지는 아들의 보살핌이 부담스럽다면서도 모든 것을 내게 의지하고 있었다.
그날, 아버지는 상념에 젖어 휠체어를 밀고 있던 나를 깨우듯 말했다.
"참, 고약한 놈들이야!" 마치 뒤주 깊숙이 꼭 감춰둔 쌈지를 꺼내는 것 같았다. 나는 "무슨 말씀이세요?"라고 물었지만 아버지는 '내가 무슨 말을 했냐'는 표정으로 반응 없이 입을 닫으셨다.
폐결핵과 함께 치매 초기라는 진단을 받은 날부터 시작된 우리 부자(父子)의 대화법이다. 병증은 초기라고 했다. 의사는 결핵이 문제지 치매는 걱정할 정도가 아니라고 했다. 의사는 "자칫 과거와 현재를 혼돈할 때가 있으니 주변에서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며 보호자의 세심한 주의를 요구했다. 믿기지 않았다. 정신력이 강한 아버지가 치매라니.
그 후 난 아버지의 말 한 마디에 촉각을 세우고 과거와 현재를 분리시키기에 바빴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내 염려를 무시하고 싶다는 듯 하루에도 몇 번씩 타임머신을 타고 현재와 과거를 배회했다.
의외의 이야기... "네 형은 참 불쌍한 아이야"
입원 10일째 되는 날이었다. 병상 위에서 매일 퇴원하자고 조르는 아버지를 달래기 위해 매연 가득한 도시 속 맑은 공기(?)를 찾아 주변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아버지는 휠체어를 밀고 있는 나보다 더 힘들어 했다. 아버지는 힘겹게 한참 동안 숨을 고르더니 입을 뗐다.
"얘야, 네 형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내가 정신이 온전할 때 해야지…. 사실 네가 네 형 성효(가명)를 남보다 더 싫어하는 것을 나도 알고 있지만 너희들은 형제가 아니냐?"아버지는 형과 나의 소원함을 탓하며 지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네가 형을 많이 미워하긴 하지만, 성효는 참 불쌍한 아이다. 네가 얼마나 미웠으면 형이 닭띠라고 해서 닭고기마저 먹지 않겠느냐. 나도 알고 있다. 넌 어려서 닭고기를 참 좋아했었는데…. 도랑에 옻나무가 있었던 거 너도 기억나지? 가을이면 너희들 먹이려고 옻껍질을 벗겨 닭과 함께 푹 고았지. 그때마다 넌 닭 반 마리를 게눈 감추듯 다 먹어치웠으니까 말이야. 네 형이 아프기 전까지는…. 그리고 너, 이번에 내가 이렇게 아파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도 성효한테 연락 안 했지? 그럼 안 된다. 아무리 미워도 네 형이고 내 아들이다."아버지의 병환으로 우리 부자는 생전 처음으로 많은 대화를 나눴다. 아버지는 당신이 살아온 과거와 현재가 혼합된 이야기를 매일 말했다. 일제강점기 말에 가담했던 항일운동에 대한 이야기, 건국준비위원으로 활동할 당시 일어났던 이야기,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 당시 민주인사 검거령을 피해 걸어서 부산까지 피해 갔던 이야기, 계엄이 해제되면서 남원에 돌아왔으나 직장이 없어 궁여지책으로 외국서적을 번역한 이야기 등등. 아버지는 자신의 겪은 삶을 실타래 풀 듯 이야기했다.
아버지와 나는 약속처럼 형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이날은 달랐다. 아버지가 형과 나와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이야기. 아버지는 말을 이어갔다.
"너희들이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 죽는 게 이 못난 아비의 소원이다. 오래전부터 네게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아비가 못나서 너희들에게 고생만 죽도록 시켰는데…, 내가 뻔뻔한 것 같아 여직 말을 못하고 있었다." 부침 많았던 삶의 마감을 앞둔 아버지의 유언이었다. '생에 마지막 소원'이란 표현으로 자식들의 화해를 바라는 모습은 며칠 동안 과거와 현재를 오가던 치매 환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신동이었던 형은 신경쇠약증에 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