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팔순 때 모습
윤영전
나에게도 우상이었던 맏형을 잃고 6·25 전쟁에서 아버지는 인민위원장, 둘째 형은 의용군으로 3개월 지냈다. 인민군 철수로 아버지와 형은 부역자로 자수했다. 형은 다시 국군에 입대하여 중상을 입고 아버지는 무고죄로 감옥살이를 했다.
둘째 형은 상이제대를 한 후 정치에 뛰어들어 세 번의 출마를 하면서 집안은 어렵게 되었다. 비록 3남이지만 나는 1965년 월남에 파견되어 귀국해 청년 가장으로 부모님을 서울로 모셨다. 그 후 결혼하여 손자가 잉태되었는데 출산일이 아버님 생신 날로 예고되었다.
그동안 8남매 자식들 때문에 고생하신 부모님에 대한 보답은 잘 모시는 것이기도 하지만, 환갑 잔치를 해드리는 것이었다. 결국 집안 식구들과 간단한 생일상으로 그날을 보내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 후 칠순이 돌아왔다. 이번에는 회갑을 못하신 몫까지 꼭 해드리려고 했지만, 당시 내가 사정기관에 근무했던 관계로 집안의 식구들끼리만 간단한 칠순 생신을 차려드렸다.
그 후 아버지는 이곳저곳 회갑 칠순 잔치에 초청을 받고 참석하신 후 소감을 피력하셨다. "오늘 초청에 간 잔치는 참으로 부러웠다"고 몇 번을 말씀하시어, 나는 넌지시 말씀드렸다. "아버지! 죄송해요. 돌아오는 팔순 때는 꼭 성대하게 잔치를 하겠습니다. 건강하게 사시고 그동안 신세지신 분들 다 초청해서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버지는 속으로 기뻐하신 것 같았다. 드디어 팔순이 돌아왔다.
1개월 전에 신흥사 주변의 회갑 등 잔치 전문집을 찾아 예약하고 준비 사항도 챙겼다. 친지 분들과 내 친한 분들만 선별한 200여 분에게 정식으로 초청장을 발송했다. 이제야 말로 부모님께 대외적으로 효도를 할 수 있었다. 흡족한 팔순 잔치를 차질 없이 하려고 만전을 다했었다. 회갑도 고희도 건너뛴 잔치이기에 어쩌면 부모님께 마지막 잔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드디어 그날이 다가왔다. 1989년 10월 29일, 약간은 긴장된 마음으로 식장 앞에서 부모님께 꽃을 달아드리고 손님들을 일일이 영접하여 식장에 안내하였다. 잘 차린 팔순 상에 부모님을 건강하신 모습으로 모시니 감개무량했다.
부친은 30년 전 무고죄로 고문을 받으시고 2달 후 무고죄로 석방되시었다. 그 뒤 건강은 회복하셨지만 이가 다 빠져 완전 틀니를 해드렸다. 40년을 피시던 담배로 해소가 있으셨는데, 담배도 끊으시고 건강을 찾으셔 시조창에 몰입한 아버지셨다.
일찍이 한국 시조회의 임원을 지내시고 전국 시조대회에 참가해 우수상 등 수십 개의 상장을 받으시고 살아오셨다. 분단으로 고난의 세월이었지만 이날만은 모든 시름을 잊으시고 친지분과 친척들을 만나셨다. 소위 기생들의 창과 춤, 그리고 당신께서도 시조를 노래하시었다. 내 생애에 그날처럼 부모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더욱 느껴본 적이 없었다. 다행히 건강하시게 살아와 주셨기에 그날이 있었다. 아버지는 82세로 어머니는 84세로 모시다가 영면하시어 고향 선산에 계신다.
지금도 그 때 부모님이 만면에 미소를 진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내 서재에 팔순 잔치 때 형제와 손자들과 함께한 사진을 걸어놓았다. 요즘 잔치에 대한 여러 가지 논란들이 있지만 소박하고 모두 만족하는 자리는 자주 있어야 하지 않을까?
부모님은 생가 친가 부모님을 잘 모셨다고 문중에서 효자효부상을 타시고, 3남인 필자 내외도 조부모님과 부모님을 지극히 한세대를 모셨다고 효자효부상을 받았다. 작금 사라져간 효를 되살리는 일은 중요하다.
내 부모님과 자식들이 분단으로 고행이었던 지난날이 그립다. 우리의 소원인 한반도 평화통일이 이뤄지면 삼천리 금수강산에 꽃이 만발할 것이다. 그 때에 저 세상에 계신 부모님과 형의 영혼이 함께한 큰 잔치를 벌이려고 한다. 한세대를 모시다 고향 선산에 잠들고 계신 부모님에게 기쁜 소식으로 전해 드리고 싶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부모님, 부디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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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한 세월 보낸 부모님의 팔순잔치, 감개무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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