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사회적, 개인적 차원으로 바라본 도피

등록 2015.05.16 11:55수정 2015.05.16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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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나는 매일 한 무더기의 약을 집어삼켜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쏟아지는 잠을 이겨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능을 망쳤다는 것이 나의 마지막 십대를 갉아먹고 있었다. 아침이 오는 것이 싫었다. 겨우 눈을 떠도 밖으로 나서는 것이 두려웠기에 하루 중 걸어 다니는 시간을 제외하면 나는 늘 잠에 빠져있었다.


현실로부터의 도피. 내게는 그 도피처가 잠의 세계였다. 우리나라 성인 8명 중 1명은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의 슬픔과 절망을 느끼는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한다. 우울증을 앓는 이들이 늘어나는 현대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욕구는 나쁜 것일까?

도피는 사전적으로 도망하여 몸을 피함 또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일에서 몸을 사려 빠져 나감을 뜻한다. 무언가 자신을 덮쳐오는 것, 혹은 책임져야 하는 것을 피해 도망치는 것이다. 단순히 사전적 정의의 '도피'라는 단어로 좋고 나쁨을 이야기하기에는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넓게 '사회적 차원의 도피'와 '개인적 차원의 도피'로 나누어보자.

지난해,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유병언, 유대균 부자의 도피를 사회적 차원의 도피라 볼 수 있다. 유씨 부자는 특경법 위반 피의자로 처벌을 피해 도피했다. 전국에 공개수배 전단지가 돌려졌고 한때, 뉴스만 틀면 유씨 일가의 이야기가 떠들썩하게 보도되던 것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횡령과 배임이라는 죄로 인한 무거운 법의 심판을 피해 달아났던 그들의 도피는 그 누구도 옳은 것이었다고 옹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법을 어긴 범죄자였으며 그들의 행위에 피해를 입은 이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회적 차원의 도피는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행위를 한 이들이 하는 도피를 말한다. 마땅히 져야 할 책임과 받아야할 처벌을 피해 도망치는 것이다.

반면 개인적 차원의 도피는 어떤가? 현실에서 스스로를 옥죄는 것으로부터 자신의 유토피아를 찾아 도망치려는 이들을 과연 나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회적 차원의 도피와 개인적 차원의 도피는 다르다. 개인적 차원의 도피는 법을 어기지 않고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자신을 도망치도록 놓아주는 것이다.

최근 북유럽으로 이민 가고자 하는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에 지친 젊은이들은 북유럽의 행복을 동경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기술을 배워 그곳에서 자리 잡고 싶어 한다. 부모는 그들의 도피를 막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떠나라고 말하기도 한다. 더 이상 이곳에서 이룰 것은 없으니 행복할 수만 있다면 그깟 이민이 어떠하냐고. 그들이 꿈꾸는 곳에서 자리를 잡고 일어설 수 있다면 무엇이든 허락지 않으랴. 이처럼 어떤 이에게 도피는 또다시 일어날 수 있는 실마리가 되어주기도 한다.


열아홉의 내가 잠을 택하지 않았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죽는 것보다 살고자 하는 욕구가 더 강했던 탓에 나는 그 도피처에서 또 다시 일어서기 위해 약을 먹었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한없이 나약해보였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다시 일어설 용기와 힘을 비축하게 해준 것이었다. 나는 과도한 수면이라는 도피처에서 다시 날아오르기 위해선 스스로 약을 삼켜야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다.

영화 <지중해>의 감독 Henry Laborit는 "이런 시대에 살아남아서 꿈을 꿀 수 있는 길은 도피 뿐"이라고 말했다. 누구나 일탈을 꿈꾼다. 누구나 절망에 빠질 수 있고 현실에서 도망치고자 하는 욕구에 강하게 사로잡힐 수 있다. 물론 현실을 피하지 않고 이겨내는 이들은 현실도피자들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똑같이 힘들고 똑같이 아픈데도 의지의 차이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현실을 피해 도망가는 상황에 처해보지 않은 이상 그들을 나쁘다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도피라는 것이 그들에게는 어쩌면 유일한 숨구멍이 되어줄지도 모르니까.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봐야할 것이다. 과연 우리는 그들을 도망자라, 겁쟁이라 나쁘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가?
#도피 #우울증 #이민계 #도피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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