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
문학과지성사
<다정>은 배용제 시인이 10여 년 만에 내놓은 시집이다. 강산도 바뀐다는 이 시간 동안 시인의 생각과 감성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변화는 시적 스타일이다. 전작에서 집요하리 만큼 끈질긴 시선으로 발견한 차가운 죽음으로 이 세계를 낯설게 그려낸 시인은 보여주는 것에서 들려주는 것으로, 이를 테면 시인이 깨달은 바를 시에서 독자에게 들려준다.
시적 목소리는 아주 낮은 저음에 가깝다. 생기가 돌지 않는 목소리는 졸린 듯 느릿느릿하고, 무언가를 체념한 사람처럼 감정의 고저가 크지 않다. 차분하지만 고요한, 그래서 어떤 고독한 울림 시에서 느껴진다.
책장을 넘겨 시를 하나둘씩 읽어가기 시작하면 이 시집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어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배용제 시인은 동물성을 내재한 어둠이라는 비가시적 이미지가 실재하는 가시적 이미지들을 어떻게 비존재로 전락하게 하는지, 그리하여 실재하는 이미지들이 지닌 시간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 유리와도 같은지 검은 상상력으로 우리에게 알려준다.
가장 불규칙한 방법으로 싹이 돋고 꽃들이 피어난다오늘이 월요일이라는 것뿐이지<다정> 中 세상의 모든 이미지를 잠식시켜 버리는 어둠이지만, 그럼에도 빛은 어둠 속에서 싹을 틔운다. 그리고 잠시 사라졌던 이미지를 재탄생 시키는 과정을 반복한다. "창가에선 몇 개의 화분이 말라죽"(<다정>)어 가고 있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싹이 돋고 꽃들이 피어나"(<다정>)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어둠의 관념적 상황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탄생의 반복을 원하는 빛의 욕망, 혹은 세상의 모든 이미지들의 욕망이며, "아무 때나 피어나고 아무 때나 시들어버리는 생물들의 욕정"(<다정>)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창백한 노을이 지고천천히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놀이터에서 잠시, 놀다 정신없이 돌아간 아이들과하루분의 햇빛을 생각한다. 아직도 시간이 남아 벤치를 견디는 노인과시간에 쫓겨 허둥대며 일어서는 부인들어두운 쪽으로만 기우는 나무의 그림자고딕으로 견뎌온 풍경들을 바라본다<놀이터에서의 한때> 中 놀이터는 이미 어두워졌고,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없는 상황이다. 시인은 이 놀이터에서 한낮에 뛰어놀던, 그러니까 "하루분의 햇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해맑게 웃음 짓던 아이들을 생각한다. 가장 선명한 시간에 자신의 이미지를 완연히 증명하고 돌아간 아이들과는 달리, 어둑해진 놀이터에는 "아직도 시간이 남아 벤치를 견디는 노인과 시간에 쫓겨 허둥대며 일어서는 부인들"이 있을 뿐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어쩌다 어둠의 틈을 뚫고 재탄생한 세상의 모든 이미지들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어둠으로 환원한다는 점이다. 함정처럼 도처에 깔린 어둠의 단면들을 이리저리 피해보려 하지만, 결국 이전의 이미지들이 그랬듯 숙명처럼 어둠으로 소멸돼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의 눈엔 고양이가 "몸에 달라붙은 햇빛을 핥아먹"(<정오>)어 다시 어둠으로 돌아가려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를 테면 일종의 이벤트다. 그것은 잠시 발생하는 사건이기에 시간은 유한적이며 영원이란 이름으로 지속할 수 없다. 시간은 "수증기 같은 날들이 빠르게 증발하는 오늘"(<계절들에게 쓴다>)과 같아 유효성이 지나면 곧바로 사라진다. 시인은 이러한 사라짐을 아쉬워하고 그리워한다. 그림자만 두고 떠나간 이들에게 손을 들어 "잘, 지냈어요?"(<잘, 지냈어요>)라고 안부 인사를 전하고 싶지만, 이미 그들과의 아득해진 거리 때문에 이내 들었던 손을 내리고 만다. 그리고 시인은 가만히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다. 흔들리는 자신의 시간을 조용히 견디면서.
다정
배용제 지음,
문학과지성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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