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의 식당가는 주말인데도 사람이 없어 한산했다.
이정화
"원전이 핵폭탄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 견딜 수 없이 불안한 거예요. 만에 하나 사고가 나면 울산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가 살 수 없는 땅으로 변하는 거죠. 우리 애가 고1인데 아이한테 이런 세상을 물려주는 것은 어른으로서 해서는 안 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를 낳았다는 게 후회될 정도로 너무 불안해요."최씨는 "원전 때문에 삶이 파괴됐다"고까지 말했다. 언제 사고가 날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일상을 짓누르기 때문이다. 설계수명을 다해 최근 폐쇄가 결정된 고리1호기는 다른 원전에 비해 사고율이 높았다. 1978년 상업운전을 시작한 후 130번의 사고·고장이 발생했다. 가동 중인 신고리 1호기는 2010년부터 2015년 사이 총 22번의 고장이 발생했고, 신고리 2호기 역시 같은 기간 두 번의 고장이 있었다.
이 기간에 고리 2호기 4번, 3호기 3번, 4호기 4번의 고장이 보고됐다. 정부와 원전 옹호론자들은 우리나라 원자력발전소가 설계상 매우 안전하며 철저히 관리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동안 빈번하게 일어난 고장·사고 등 관리부실과 부품 관련 비리 등을 감안할 때 이를 믿기 어렵다고 최씨는 말했다. 또 원전에서 새 나오는 방사성 물질에 대한 건강 우려도 크다고 덧붙였다.
"원전이 가동되면서 방사성 물질이 공기 중으로 방출되고 있잖아요. 보이지 않고 냄새도 없고 느낄 수가 없으니까 더 불안하죠. 인간의 지각을 벗어난 공포인 거죠." 최씨는 삶의 터전인 울산을 쉽게 떠날 수도 없고, 위험한 원전을 근처에 두고 맘 편히 살 수도 없어 괴로운 것이 이 지역 주민들의 마음이라고 전했다. 그래서 그는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지난 4월 '노후원전 폐쇄를 위한 울산운동본부'를 만들어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지난 6월 고리1호기 가동중단이 결정된 후에는 이 조직을 '탈핵공동행동'으로 전환했다.
후쿠시마 사고 전까지만 해도 원전에 아무 관심이 없었던 최씨지만, 2011년 3월의 사고는 그의 삶을 총체적으로 바꾸었다. 원전이 '죽음의 에너지'라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 우리 사회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어떤 대응이나 대책도 마련하지 않는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주민 서명운동과 원전의 실상을 알리는 교육 등 핵발전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민운동에 발 벗고 나섰다.
만일의 사고에 대비한 시설도, 훈련도 없는 현실 "제 주변에 울산을 떠난 사람도 많아요. 남편만 울산에 남아 있고 아내와 아기는 다른 곳에 가 있는 경우도 있고요. 아예 울산에 집을 안 사요. 다른 지역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 거죠. 이웃들이 가만히 있으면 괜찮은가 보다 하지만 이제는 다 아니까,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거죠."울산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서진희(33, 여)씨는 울산시 울주군 범서읍에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 생업을 두고 울산을 떠날 수 없는 그는 원전 사고가 났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아보고 대비해야 겠다고 결심했다. 최씨가 사는 동네는 지난 4월 21일 원자력안전위원회에서 확정한 '방사선비상계획구역' 30km 안에 포함된다. 방사선비상계획구역은 원전 사고에 대비해 방호약품을 구비하고 구호소를 확보하는 등 주민보호 대책이 마련되어야 하는 범위다.
과거에는 원전시설 반경 8~10km 범위에서 운영해왔으나 이번에 기준을 강화해 고리원전의 경우 반경 20~30km로 정했다. 경북 경주의 월성원전 등 다른 원전들도 지역별로 원전 반경 20~30km를 비상계획구역에 포함 시켰다. 미국의 경우 원전에서 80km까지, 벨기에·핀란드·독일 등 유럽 국가는 20~30km를, 헝가리는 최대 300km를 비상계획구역에 포함시켜 관리하고 있다. 서씨는 우리나라의 경우 비상계획구역 내에서도 이렇다 할 사고대비책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