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참사 2주기 대학생대회서울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2주기 대학생대회. 약 1300여 명의 대학생이 참가했다.
유승우
우리는 그렇게 세월호 가족들과 소통하며 대학생들이 할 수 있는 활동을 하나씩 하기 시작했다. 4월 16일 세월호 참사 2주기 때에는 80여 개의 대학·단체들과 함께 대학생대회를 열어 광화문까지 행진을 했고 5.18 때는 가족들과 함께 광주에 갔다.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가족들이 대학생들을 볼 때마다 별이 된 아이들을 떠올린다는 것을, 그런 대학생들을 정말 많이 믿고 계신다는 것을 가슴 깊이 알게 되었다.
그렇게 세월호 인양이 약속된 7월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실패한 세월호 선수들기, 그리고 특조위 강제종료 2차 청문회 때 세월호 선체에 잠수해 찍어온 영상을 보았다. 영상에서는 평형수(배의 균형을 잡아주며 복원력을 위해 배의 밑바닥에 채우는 물)가 '0'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청문회장에서는 왜 평형수가 '0'인지 묻고, 관계자의 모른다는 답변이 이어졌다. 세월호 안에는 이처럼 참사 당시의 상황이 그대로 남아있다. 세월호 선체를 참사의 증거 1번이라 말하는 이유다.
애초에 정부는 5월 말에 선수 들기(세월호의 뱃머리를 들어 올려 배 아래에 리프팅빔을 밀어넣는 작업)를 시작해 7월 말에는 세월호를 인양하겠다 약속했다. 계획보다 2주 늦어진 6월 초에 선수 들기가 시작되었다. 인양업체 선정과 인양과정 유가족 참관 등에서 이미 가족들과의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선수 들기는 네 차례의 시도 끝에 선체만 찢어놓은 채 실패로 끝났다.
배 안에 9명의 미수습자가 남아있건만 배는 찢어졌고, 이미 뚫어놓은 92개의 구멍 조각마저도 유실되었다 했다. 실패 이후에 인양작업을 언제 다시 시작할지도 아무도 알지 못했다. 게다가 정부는 '특별조사위원회'(이하 특조위)의 활동 기간을 자의적으로 축소시켰다. 원칙대로라면 내년 2월까지인 활동기간을 6월 말 까지로 축소시키고 예산 또한 지급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