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러시안소설>의 한 장면
(주)루스 이 소니도스
1. 최근 불거진 한국문학의 여혐 논란을 보면서 나의 20대 초반을 휘감았던 '문학뽕'에 대해 생각해봤다. 문학뽕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것은 왜 여혐적인 요소를 담지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2010년도에 국문과에 입학했다. 문학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고 글을 쓰고 싶었기 때문에 지원했던 것 같다. 수업은 잘 들어가진 않았지만 선배들 이야기는 철저히 주워섬겼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은 '문학뽕은 일단 반제도권적'이라는 사실이었다.
2. 일단 문학뽕을 맞게 되면 토익으로 대표되는 자기 계발적인 모든 것을 극렬하게 혐오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토익과 같이 기업이 원하는 무언가를 하게 되면 문학적이지 않단 생각을 하게 했다. 학점을 올리려는 시도(설사 그것이 문학수업이더라도), 스펙을 올리기 위한 대외활동 경험은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한 선배는 삼성에 들어가며 미안해했고, 누군간 어학연수를 가는 친구를 욕했다. 팀플을 안 하는 것은 문학적이지만 학점을 올리기 위해 밤새 문학 공부하는 건 반문학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3. 여기까진 예전 운동권 투사의 모습과 비슷할지 모른다. 각자의 생각을 존중하는 게 결여되어 있고 자신들이 반대하는 것에 동조하지 않으면 '부역자'로 낙인찍는 점 말이다. 그러나 교조적 문학뽕에겐 다른 점이 있다. '연애'엔 상당히 관대하다는 것.
연애가 뭐가 나쁘냐, 싶지만 문제는 그걸 강요한단 점이다. 진정한 독자가 되기 위해서, 진정한 창작자가 되기 위해서 연애는 선행과제로 여겨졌다. 같은 책을 놓고 비평을 하더라도 연애경험이 없다면 텍스트 이해도가 낮을 거라는 의식이 공고했다. 어떤 비유, 어떤 상징체계를 이해하기 위해선 연애경험이 문학공부보다 쓸모 있게 여겨졌다.
고백하고 차인 친구에겐 친하지 않은 선배도 술 사준단 연락을 먼저 한다. 술자리에 빠지는 이유로 토익학원에 가는 건 안 되지만 연애를 하러 가는 건 된다(문학뽕 감염자가 반대하지 않는 제도권적인 게 있다면 아마 연애가 유일할 것이다). 사랑에 미치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며, 그로 인해 인간적 성숙을 얻게 된다는 믿음은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제도권에 대한 성찰'을 마비시키곤 했다.
연애를 부추기고 대단한 것으로 신화화하는 것에 '연애주의'에 대한 성찰이 결여되어 있는 건 둘째 치더라도, 그것이 지나치게 헤테로 남성중심이란 사실은 심각한 문제다. 한 남자 선배는 자신에게 사랑이 뭐냐고 물어봐 달라 했다. 그대로 물어보니 "사랑은 XX년이야"라고 말한다. 나는 이 말이 많은 것을 요약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문학뽕 감염자에게 사랑은 절대 'XX놈'이 아닌 것이다. 발화자는 남성이었고, 대상은 언제나 여성이었다.
4. 물론 문학뽕에 걸린 부류들과 필드의 한국문학 생산자들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단 사실을 안다. 또한 내가 입학하고 문학뽕 걸린 사람을 만나지 않은 지도 벌써 몇 해가 흘렀다. 현재의 그들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얼마나 성찰하고 있는지도 잘 모른다.
그러나 추측하건대 나보다 윗세대에서 문학뽕에 빠진 사람은, 남성중심적 헤테로 연애주의에 대해선 지금보다도 더 비성찰적인 토양에서 청년 시기를 보냈을 것이다. 그런 토양이 현재의 한국문학과 무관하다고 볼 수 있을까? "늘 여자가 방석처럼 깔려있다"는 문단에 대한 한국일보 기자의 평가도 이러한 환경과 맞닿아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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