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꽃, 보리꽃, 옥수수꽃... 우리를 먹여 살리는 꽃

[서평] 사람을 살리는 곡식꽃 채소꽃 <밥꽃 마중>

등록 2017.03.27 10:18수정 2017.03.27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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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 마당 한쪽 텃밭에서 우아하고 고전적인 문양의 하얀 레이스처럼 펼쳐진 꽃들이 하늘대는 것을 발견했다. 작은 꽃들이 동그랗게 돌아가며 다발 모양으로 한 줄기에서 나오는데, 저걸 따서 결혼식 꽃다발을 만들면 예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에 무지하던 나는 남편에게 저 꽃이 뭔지 아느냐고 물었고, 남편은 무심하게 작년에 캐지 않은 당근이 밭에 들어있다고 했다.

 <밥꽃 마중>
<밥꽃 마중>들녘
세상에 그게 당근꽃이었다니! 무릇 꽃의 존재는 아름다움을 뽐내기 위함이라 생각했다. 시골에 내려와 살기 전까지는 그랬다. '사람을 살리는 곡식꽃 채소꽃'이란 부제가 들어간 <밥꽃 마중>은 나처럼 무지하고 무심했던 독자들에게 꽃의 효용과 생명으로서의 존재적 역할을 새삼 일깨워준다.


책을 열면 육십여 종의 곡식꽃, 채소꽃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소개하는 꽃들은 화려함의 대명사인 장미나, 작약이나, 튤립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먹는 작물의 꽃, 벼꽃, 보리꽃, 옥수수꽃, 감자꽃, 마늘꽃, 당근꽃, 고구마꽃, 배꽃 등이다.

<밥꽃 마중>은 농부인 작가가 손수 농사를 지으며, 때론 여기저기 핀 꽃을 찾아다니며 관찰한 세심한 기록이자, 피사체에 대한 애정을 넘치는 생생한 화집이자, 생물학적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도감이다. 머리글과 차례를 지나, 첫 장에서는 우리가 매일 먹는 벼의 꽃을 소개한다. 벼에도 꽃이 핀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흥미롭게 첫 꽃 소개를 읽어 내려갔다.
  
'농학에서는 벼꽃을 이를 때 '이삭이 팬다'고들 한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이삭 하나에 작은 벼꽃 100여 송이가 핀다. 우리가 먹는 쌀 한 알 한 알이 이렇게 영그는 거다. (중략) 이렇게 벼꽃 한 송이가 피었다 져야 쌀 한 톨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먹는 밥 한그릇은? 벼꽃 한 다발이 피었다 진, 사랑의 결실이라 하겠다.'

벼꽃으로 시작한 Part 1에서는 보리꽃, 밀꽃, 기장꽃, 조꽃 등의 곡식꽃 종류와, 대두꽃, 동부꽃, 완두꽃, 녹구꽃 등의 콩꽃 종류를 소개한다. 대체로 볼품없는 곡식꽃을 지나 콩과류 꽃들은 작지만 예쁘장한 것들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여러 장의 노란꽃잎으로 이루어진 팥꽃은 노란 장미처럼 유혹적이고, 샛노란 땅콩꽃은 난꽃처럼 기품있으되, 명랑한 분위기를 풍긴다. Part 2와 3에서는 채소꽃을 장미군과 국화군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누가 호박꽃을 못생겼다고 했을까? 내 눈에는 흡사 커다란 나팔꽃처럼 보이는 커다란 호박꽃은 쾌활하고도 번죽이 좋아 보인다. 그런 호박꽃이 어여쁘게 폈다가 노란 잎을 오그라뜨리며 축 처져 사그라들면 그 아래에서는 애호박이 올라온다.


꽃이 피고 진 후, 열매가 맺히는 것이다! 아이들을 낳고 기르는 여자에게서 싱싱한 젊음이 서서히 사그라지듯, 그러나 그녀의 싱싱한 기운이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전달되어가듯 말이다.

'식물 처지에서 꽃은 에너지 덩어리다. 호박꽃은 워낙 넉넉하다 보니 사람조차 탐을 낸다. 꽃잎을 먹는다. 열매를 맺을 암꽃은 놔두고, 수꽃을 딴다. (중략) 호박꽃은 사랑도 새벽형이다. 꽃가루받이하기 좋은 시간은 오전 6시쯤. 부지런한 벌의 도움을 받아 이른 아침부터 뜨겁게 사랑을 나눈다. 9시 반만 넘어가면 꽃가루는 활력을 잃어버린다. 더는 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때맞추어 그 시간만 집중하는 셈이다. 오후 1~2시쯤에는 시들어 버린다. 더는 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물론 꿀도 만들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애호박을 키우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을 테니 말이다. 꽃가루받이를 끝내고 축 처진 호박꽃에는 저녁 인사로 뭐가 좋을까?'


Part 4에서는 나무꽃, 들꽃을 소개한다. 겨우내 헐벗었던 나무들이 꽃을 피우는 봄이 되면 마음이 설렌다. 전국 여기저기에서 봄꽃 축제가 마련되고, 사람들은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봄꽃을 보러 먼 여행을 하기도 한다.

4월, 흐드러지게 피는 벚꽃을 상상해 보라. 봄에는 벚꽃뿐 아니라, 배꽃도 피고 복사꽃도 핀다. 하얀 배꽃이 핀 과수원 주변, 분홍빛 복사꽃이 여기저기 펴있는 시골 풍경은 우리에게 보편적이고도 근원적인 '고향'을 떠올리게도 한다. 배꽃 이야기를 들어보자.

배꽃이 활짝 피는 철이 돌아오면 식구들과 배꽃 나들이라도 다녀오면 어떨까? 배꽃이 피면 하얀 세상이 펼쳐져 그 꽃을 바라보면 마음도 맑아진다. 하지만 향기는 뜻밖에도 '구리다'. 그렇게 깨끗한 꽃에서 나는 향이 밤꽃 향과 비슷하다니, 옥에 티다.

'봄에 나무에 흰색 꽃이 환한 건 자두나무꽃도 그러하다. 자두꽃도 배꽃도 흰 꽃잎에 푸른 꽃받침이 같다. 그럼 어떻게 구별할까? 자두꽃은 꽃잎이 작아 꽃잎 사이로 꽃받침이 보여 멀리서 보면 푸르스름한 기운이 느껴진다. 배꽃은 꽃자루가 길고, 하얀 꽃이 한자리에 여러 개가 고르고 모여 편평꽃 차례로 핀다. 암수한그루이며, 꽃잎은 희고 둥근 꽃잎 다섯이 서로 겹쳐지며 피는 갈래꽃. 암술은 배나무 종류에 따라 2~8개. 수술은 20~30개 정도. 꽃잎이 펼쳐지면 그 한가운데 수술의 분홍빛 꽃밥이 동그랗게 모여 허리를 숙이고 있다가, 꽃밥이 익으면 하나하나 허리를 펴고 일어서 꽃가루를 다 날리면 진갈색으로 바뀐다. 우리가 보통 먹는 배 과육은 꽃받침통이 자란 것이며, 가운데 단단한 부분이 씨방이다. (중략) 꽃말은 온화한 애정, 위안, 환상

농부는 기르는 작물에 애정을 품는다. 작물도 생명인지라 사랑을 받으면 더욱 큰 에너지를 얻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우리의 밥상에 오를 것이다. <밥꽃 마중>을 읽다 보면 장영란, 김광화 부부의 사랑이 느껴진다.



이들 부부는 사실 내 이웃이기도 다. 농부 작가를 이웃으로 둔 나는 이 책을 받아 들며, 마을을 오가며 이들과 마주쳤던 예전의 기억이 몇 떠올랐다. 아침 일찍 산에서 내려오는 김광화씨가 잣나무에 꽃이 펴서 그걸 보러 갔다 내려오는 길이라고 했던 기억, 벼꽃이 폈다며 삼복 더위에 차를 몰고 꽤 먼 외지에 나가던 모습, 마을 길가에 있는 밭에서 쪼그리고 앉아 골몰하듯 농사에 몰두하던 이들이 모습 등등.

의외의 시간, 의외의 장소에 가던 이들 부부가 이런 책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나는 작물에 대한 그들의 열정이 유난스럽다고 생각했다. 그 유난스러움이 이렇게 멋진 책으로 탄생할 줄이야.

곡식꽃, 채소꽃에 대한 그들의 관심과 사랑, 사진을 얻으러 발품을 판 열정과 수고로 탄생한 책을,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점점 잃어가는 현대인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밥꽃 마중 - 사람을 살리는 곡식꽃 채소꽃

장영란.김광화 지음,
들녘, 2017


#밥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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