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4월 23일 동원탄좌 예비군 무기고를 지키고 있는 광부들
추광규
진실화해위는 "4월 21일 밤의 혼란 상황에도 불구하고 시장 상인과 민가에 대한 피해는 거의 없었으며 공격의 대상이 주로 평소 광부들의 원성의 대상에 국한되었다는 점이 인정된다. 또 시위 농성의 주체들이 비조직적이었으며 투쟁의 대상을 명확히 설정하지 못하고 체계적인 지휘가 부재하였으며 통제되지 않은 불만의 폭발로 인해 막대한 물적 인적 피해를 낳았고 일부 직원 사택의 재산을 파괴한 행위가 있었다는 점도 확인된다"고 설명했다.
진실화해위는 이어 "교통사고 직후 분노한 광부와 주민들의 폭력행위가 통제되지 않는 상황에서 당시 일부 광부들은 위험시설인 화약고와 무기고를 지켜 더 큰 피해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다"면서 "정기적인 군사훈련을 받고 있던 30~40대 위주의 남성 광부들이 무장했을 경우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상황이었다. 사북사건 기간 중 일부 술에 취한 주민들의 행패에도 불구하고 화약고와 무기고를 안전하게 지킨 동원탄좌 광부들의 이성적 행동이 극단적인 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사북 주민들이 안경다리 사건 이후 광부들에게 쫒기는 경찰관을 돕는 사례도 많았다. 박낙현 심을보 등 다수의 사북주민들은 부상당한 경찰들을 자신의 차량으로 병원까지 후송하고 광부들에게 쫒기는 경찰을 민가에 숨겨주고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혀 돌려보내는 등 인명피해를 줄이는데 큰 기여를 했다.
사건이 숨 가쁘게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광부들을 대표하는 수습위원과 당국과의 사이에는 원만한 사태수습을 위한 노력이 계속 되고 있었다.
이원갑 회장의 증언이다.
"4월 22일 아침 8시경 제일약국 최홍원이 나를 보자고 했다. 수습대책본부가 설치되어 있는 고한파출소에 데리고 갔다. 들어가보니 강원도지사 강원 도경국장 등이 있었다. 들어선 나를 보던 도경국장은 대뜸 '니가 이원갑이야?'라고 하더니 곧 바로 '이 새끼 가두라'고 명령했다.그리고는 경찰 300여명 데리고 진압하러 간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지금 광부들이 흥분해 있는데 진압하다가 서로 피해가 발생할 거라고 하면서 말렸다. 그는 '이 새끼 말이 많다. 데려가'라고 했다. 삼척탄좌 객실에 갇혀 있었다.오후 4시경 국장이 부른다고 해서 나가보니 서울에서 광산노조 최정숙 위원장이 경찰 헬기를 타고 왔다면서 내려와 있었다. 그날 오전 경찰 진압에 문제가 있었다고 했다. 현재 광부들한테 지부장 부인이 붙잡혀 기둥에 묶여 있다. 자기들은 도저히 풀 방법이 없다면서 나보고 내려가서 풀어주고 협상안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협상안 말이 나온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23일 오후 시내에 있는데 어떤 사람이 나한테 오더니 오늘밤 12시에 공수부대가 투입된다고 하더라. 그래서 그 얘기를 참모들에게 건네니까 공수부대가 투입되면 광부들만 다치고 아무런 성과도 없이 허무하게 끝나는 것이라고 말했다.그래서 공수부대가 들어오면 항거하기 위해서 무장을 하려고 했다. 당시 무기고는 우리 참모들이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이렇게 돼서 우리가 무장을 할 것이라는 정보가 위로 올라가니까 수습대책위도 비상이 걸렸던 것 같다. 그 때부터 협상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24일 아침 8시경 협상안이 타결될 수 있었다. 만약 우리가 무기고를 지키고 있지 않았고 무장의 가능성이 없었다고 한다면 불과 20여일 후 광주에서와 같은 더 큰 비극이 발생할 수 있었을 것이다"진실화해위는 "1980년 4월 22일부터 24일간 협상과정은 계엄사령부의 공수부대 투입계획과 맞물리며 긴박하게 진행되었다. 최종 협상이 진행되던 4월 23일 밤 계엄사령부는 4월 25일 새벽을 군 병력 투입시점으로 정해놓고 11특전여단 2개 대대병력에게 작전명령과 부대 배속결정을 내린 상황이었다. 따라서 사태 핵심 당사자들이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합의문을 작성하고 평화적으로 타결한 것은 대규모 충돌사태와 더 큰 인명피해의 가능성을 사전에 막을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사흘이 지난 '사북'...사람들 마음의 상처는 평생 동안 가슴속에 수습대책위와 대화에서 경찰은 가담자들에게 실력행사를 하지 않는 것은 물론 최대한 원만히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종이쪽지에 불과했다. 합의문 발표에 따라 광부들이 해산 후 업무에 복귀한지 열흘 만에 검거 작전이 개시됐다. 사북에서 정선으로 끌려가는 과정에 대해 연행자들은 지옥이었다고 술회했다.
끌려간 광부들에게는 무차별적인 폭행과 물고문이 자행됐다. 충격적인 것은 연행된 광부 부인들에게 가해진 경찰관들의 성고문이었다. 진실화해위가 지난 2006년 1차 조사에서 피해자들로부터 청취한 내용이다.
# 1.5m 정도 네모난 각목으로 전신을 맞았습니다. 엎드려 놓고 세워놓고 때렸습니다. 여자들은 윗옷을 벗겨 젖가슴을 쥐어뜯었습니다.#여자들은 그놈들이 팬티를 벗겨놓고 왼쪽 오른쪽 하며 희롱을 했습니다.#나중에는 팬티가 피에 젖어 살갗에 들러붙었어요. 또 유방을 비틀고 젖꼭지를 잡고 비틀어 살갗이 벗겨질 정도였지요.
#조사를 하면서 바른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저의 젖가슴을 우악스럽게 마구 잡아 제키고 쥐어뜯고 (중략) 그 당시 저의 나이가 41세 이었습니다.#풀려난 여자들은 집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 그런 얘기를 하고 다니지도 않았습니다. 내 짐작에 그들도 말은 안하지만 같은 고통을 겪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 얘기를 하기가 쉽지 않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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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물차는 굴러가는게 아니라 뛰어서 갈 수도 있습니다. 물론 화물칸도 없을 수 있습니다. <신문고 뉴스> 편집장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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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누 끼치면 보안부 갔다"… 광부 부인 성고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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