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를 '무사히' 만날 수는 있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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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무사히'라고 함은 아빠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빠의 뇌출혈이 처음이 아니었기에 회복 과정을 머리로 그려볼 수 있었다.
의식도 미동도 없이 누워 계시던 아빠는 몸의 운동을 처음 익히는 어린 아이처럼 새롭게 몸을 움직이며, 앉고, 서고, 걷게 될 것이다. 더듬더듬 말을 시작하실 것이고, 식사를 하고, 대소변을 가릴 것이다.
예상대로 아빠는 천천히 좋아지셨다. 그런데 뭔가 달랐다. 아빠의 반응이 예전 같지 않았다. 아무리 큰소리로 부르고, 말을 걸어도 아빠는 먼 산만 바라보셨다. 예상 궤도에서 벗어난 아빠의 모습에 불안이 커지기 시작했다. 이상을 눈치 채고 병원 측에 알리자 그제야 뇌출혈로 인한 청신경 손상인 것 같다는 답이 왔다. 청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니 일단 지켜보자는 말, 좋아질지도 모른다는 확신 없는 말들이 병실 안을 떠 다녔다. 알아듣기 어려운 설명은 흩어지고 아빠가 소리를 잃었다는 분명한 사실만 남았다.
듣지 못하게 된 아빠는 소리만 잃은 것이 아니다. 아빠는 한 걸음 내딛는 것도 불안해 지팡이를 의지해야 했고, 아빠의 병수발을 혼자 감당하는 엄마에게 신경질을 내기 일쑤였다. 아이들이 조금만 과한 몸짓으로 놀아도 아빠는 손사래를 치며 아이들을 말렸다.
소리가 사라진 세상에서 아빠는 예민했고, 겁을 냈다. 삶의 다채로움은 단번에 무채색으로 바뀌었다. 다양한 소리가 어우러진 어린 손주들의 몸짓이, 여느 할아버지·할머니들에게는 보는 것만으로 즐거움이 되는 일상의 작은 행동이, 아빠에겐 음소거된 상태로 전달된다. 아이들이 '하부지' 하며 부르는 소리, 주크박스처럼 쉼 없이 노래 부르는 소리, 어설퍼서 재미있는 아이들의 처음 말, 그 어떤 것도 아빠에게 가 닿질 않는다. 모처럼 가족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멀찍이 떨어져 앉아 바라보는 아빠에게 눈길이 간다. 우리끼리 웃고 떠드는 게 미안해 어느새 나도 자동으로 음소거 기능을 켠다. 아빠는 소리를 잃었고, 우리 가족은 소통을 잃었다.
미소로 인사를 대신하는 아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