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도 한국인도 잘 모르는 '창사 임시정부청사'

[해외리포트] 미로 같은 골목 끝에 자리, 번역 오류 등 아쉬워... 정부, 복원에 더욱 신경써야

등록 2018.03.04 11:58수정 2018.03.04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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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내 2~3선(중소도시) 도시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다. 좁고 오래된 건물을 허문 자리에 넓은 대로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마천루가 들어서는 방식이다.

후난성의 성도 창사는 대표적인 중국의 2선 도시다. 그리고 그곳에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 만한 일제 치하 시대 독립 운동의 선봉장에 섰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자리해 있다.

한국인에게는 익숙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이지만, 독립 운동 세력의 본거지가 됐던 청사가 후난성 창사에 소재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상하이, 충칭 등 대도시에 소재했던 역사가 더 많이 알려졌기 때문인데, 필자가 찾아간 곳은 한국인에게 낯선, 그러나 우리의 아픈 역사가 그대로 보존된 창사시 카이푸취(开福区) 연승가 남목청 6호에 소재한 임시정부 청사다.

미로 같이 좁고 어두운 골목 끝에서 찾은 임시정부청사

 후난성 창사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가는 길목의 도시 개발이 한창이다.
후난성 창사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가는 길목의 도시 개발이 한창이다.임지연

"한국의 임시정부청사가 여기 있다고? 글쎄... 들어본 적은 있는 것 같은데 위치는 나도 잘..."

미로 같은 길목을 헤매면서 길가의 상점 주인 내외에게 한국 임시정부 청사 위치를 묻자, 오히려 '한국 임시정부 청사가 왜 창사에 있느냐'는 식의 질문을 수차례 받았다. 제대로 된 간판이나 안내문 조차 설치돼 있지 않은 탓에 인근 주민들 역시 100여 년 전 우리 역사의 한 조각이 이곳에 보존돼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이 많았다.

실제로 필자가 3월 1일 직접 임시정부청사를 찾아가는 길은 험난했다. 창사시에서도 비교적 고가의 빌딩과 대형 쇼핑몰이 있는 카이푸취(开福区) 중심가이지만, 청사가 자리한 길목은 유난히 좁고 어두운 1950~1960년대 한국의 여느 도시 골목을 떠올리게 하는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날 이 일대 골목을 무려 3차례 헤맨 끝에 청사 건물을 찾을 수 있었는데, 길눈이 밝은 현지 가이드 없이 한국인이 직접 청사를 찾아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가는 길목에 한국어로 적힌 작은 간판이 있었지만, 이는 청사 인근까지 당도한 뒤에야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실제로 길을 찾는데 도움이 되는 현판은 어디에도 없었다. 더욱이 이 일대는 대형 전통 시장과 수산물 시장이 골목 끝자락에 자리한 청사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위치해 있는 형태다.

 후난성 창사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가는 길목의 도시 개발이 한창이다.
후난성 창사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가는 길목의 도시 개발이 한창이다.임지연

또, 청사 인근은 현재 대규모 개발이 진행되는 지역이자 지난 2013년 이후 시 정부가 지정한 개발 특구로, 청사를 바라보는 문턱까지 모든 집들이 허물리거나 거주민이 철수한 상황이었다.


우리 땅에 소재하지 않은 청사의 아슬아슬한 현재 상황이 마치 과거 역사 속에서 우리 땅을 떠나 중국 전역을 떠돌아야 했던 임시정부의 상황과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던 부분이다.

실제로 청사 근처의 모든 상점과 거주민들은 지난 2016년 이미 철거를 완료했고, 일부 지역 주민 가운데 이주가 어려운 형편의 사람들과 나이 많은 어르신들만 이 골목에 남아 거주해 오고 있는 형편이다.

중국인·한국인 모두에게 잊힌 듯한 인상의 청사

 후난성 창사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후난성 창사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임지연

 후난성 창사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후난성 창사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임지연

어렵게 찾아간 청사 내부에는 필자 외에는 입장권 발권을 돕는 현지 직원 1인뿐이었다. 미로 같은 골목 끝에 자리한 청사는 평소에도 찾는 이가 드물어 보였는데, 현지 안내원에 따르면 청사를 찾는 이들의 대부분은 장가계 여행을 온 단체 관광객들이 이곳을 함께 들르는 경우에 한정돼 있다고 했다. 장가계는 창사에서 기차로 약 2~3시간 거리의 대표적인 풍경구다. 청사를 목적으로 찾아오는 이들은 매우 드물고, 그나마 단체 관광객들이 찾아올 때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마치 청사와 인접한 곳에 거주하는 중국인은 물론 한국인에게도 잊혀진 듯한 인상의 임시정부청사는 50위안(약 1만원)의 입장료를 지불한 뒤 들어설 수 있었다. 청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청사 1층 바닥에 설치된 유리문이다.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좁은 지하 공간에 잠시 몸을 숨겨야 했을 과거 임시정부 청사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의 급박했던 상황을 예측할 수 있다.

불과 1~2평 남짓한 나무로 둘러싼 좁은 공간은 일본군의 습격 시 대피하기 위한 공간으로 활용됐다고 한다. 해당 지하 공간을 지나 만난 1층 영상실에서는 약 5분에 걸쳐 창사에서 활동했던 당시의 독립 운동가들의 상황에 대한 설명이 방영된다. 영상물에는 김구 선생의 생명이 위중한 사태에 이르렀던 남목청 사건의 간단한 개요와 당시 창사 정부와 중국 공산당의 다양한 지원 하에 독립 운동가들의 활동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진행됐다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임시정부청사 지하 1층에 위치한 긴급대피소 공간.
임시정부청사 지하 1층에 위치한 긴급대피소 공간. 임지연

 임시정부청사 1층 내부
임시정부청사 1층 내부임지연

특히 '1937년 7월 일제가 중국 본토를 침략하자, 중국 정부는 11월 수도를 중경으로 이전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또한 창사로 이전하게 되었다'라는 기록을 통해, 당시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중국의 운명과 우리 민족의 운명이 긴밀한 관련성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당시 중국은 조선의 독립 운동 세력인 한국 국민당에게 매월 2500원을 지원했으며, 청사와 임시정부 전반을 운영했던 김구 등 독립 운동지사들에게 1932년 9월부터 1941년까지 월평균 5000원을 지원했다고 임시 정부 청사 홍보 영상물은 설명하고 있었다. 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창사에서 활동하는 동안 중국 정부와 후난성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협조를 받으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는 등의 내용을 적은 문구가 청사 곳곳에 걸려 있다는 점에서 당시부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한중 양국의 오랜 역사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영상물 상영이 종료된 이후에는 1층에 설치된 김구 선생의 동상을 확인할 수 있다. 현지 안내인에 따르면 해당 동상은 김구 선생의 후손들과 백범기념사업회에서 제작해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이어 2층으로 이어지는 길목에는 이곳을 찾아오는 한국인 관광객들을 위해 각종 현지 기념품을 판매하는 곳이 있었다. 그 너머의 나무 계단을 올라가면 중국 인민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그리고 당시 해당 지역의 우두머리였던 당 간부 등의 사진과 실물 크기로 제작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등의 홍보물이 전면에 배치돼 있다. 

또, 이어진 침실에서는 지난 2009년 중국 정부가 복원한 임시정부 청사 시절 현익철, 지청천 등 독립운동가가 사용했던 좁은 침상이 눈에 들어온다. 이밖에도 윤봉길 의사가 친필로 작성했다는 '사내 대장부는 집을 나서면 그 뜻을 다 이루기 전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은 '대장부 출가 생부환'이라는 문구가 벽면에 장식돼 있다.

이어진 전시실에서는 김구 선생과 마오쩌둥이 과거 나눴다는 대화의 일부가 문자화 되어 게재돼 있다. 1945년 9월 3일 두 사람이 나눴다는 해당 대화문에서는 "백범 선생님, 당신의 이름은 제가 징강산 때부터 들었습니다. 일본 사람이 당신을 무서워하고 미워한다고 들었습니다"라고 적었고, 이어 김구 선생은 "저는 주은래 선생님께 모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의 사업을 지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답변했다고 설명돼 있다.

 임시정부청사 내부
임시정부청사 내부 임지연

 임시정부청사 내부
임시정부청사 내부임지연

아쉬운 것은 지난 2009년 중국 정부의 주도 하에 진행된 정부청사 복원 과정에서 한국어 번역 작업 역시 현지에서만 진행, 서투른 우리말 표기가 눈에 띄었다는 점이다. 중국식으로 한국어를 번역하거나 띄어쓰기 등 단순한 오류를 쉽게 찾아 볼 수 있었다.

더욱이 당시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 혁명단 본부로 활용되는 등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역사적 사실보다는 오히려 중국 정부가 한국의 독립 운동가들에게 얼마나 큰 경제적 지원을 제공했는지 여부에 중점을 두고 복원한 듯한 인상을 지우기 힘들었다는 점도 아쉬웠다.

이곳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난징-전지앙'에 이어 4번째로 머물렀던 지역이다. 이후 항일전쟁시기 더욱 급박해진 임시정부는 광저우, 류저우, 치장, 충칭으로 고단한 행군을 지속한 뒤, 마지막 충칭에서 광복을 맞는다.

하지만,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올해로 99년이 흐른 현재에도 남의 땅에 위태롭게 존재하는 임시정부청사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중국 정부의 지원 하에 복원과 보존을 기대하고 있는 상황처럼 보였다. 과거 우리의 아픈 역사가 보존된 공간이지만, 99년 전과 비교해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어 보이는 정부청사 앞에서 당시 1평 남짓한 공간에 의지해 몸을 숨겼을 독립 운동가들의 고단한 처지가 느껴지며 쉽사리 발길을 돌리기 힘들었다.

한편, 청사는 지난 2007년 6월 중국 정부에 의해 복구, 2009년에는 해당 건물의 일부를 재복원한 뒤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기념관 현재의 모습으로 일반에 공개됐다. 현재 청사 내에는 무료로 배포되는 한글판 안내서가 배치돼 있는데, 이는 앞서 서경덕 교수와 배우 송혜교씨가 후원한 비용으로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임시정부청사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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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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