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탑과 당간중초사지에 서 있는 두 기의 문화재는 어느 방향에서 촬영해도 좋다
하주성
중초사는 어떤 절이었을까?중초사는 적지 않은 규모의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물 제4호로 지정된 중초사지당간지주의 '중초사지 당간지주명'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보면 「보력 2년(신라 흥덕왕 1년, 826년) 세차 병오년 8월 초엿새 신축일에 중초사(中初寺) 동쪽 승악의 돌 하나가 둘로 갈라져 이를 얻었다.
같은 달 28일 두 무리가 일을 시작하여, 9월 1일 이곳에 이르렀으며, 이듬 해 정미년(827년) 2월 30일에 모두 마쳤다. 이 때의 주통은 황룡사의 항창화상이다. 상화상은 진행법사이며, 정좌는 의설법사이고, 상좌는 연숭법사이다. 사사는 둘인데 묘범법사와 칙영법사이다. 전내유내는 둘인데 창악법사와 법지법사이다. 도상은 둘인데 지생법사와 진방법사이며, 작상은 수남법사이다」고 적고 있다.
당시 중초사에는 다양한 직분을 갖고 있는 승려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는 국통 밑에 주통과 군통이 있었는데 중초사에 주통이 있었다는 것은 중초사가 작은 사찰이 아닌 위치에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에 절의 살림을 맡아하는 원주(정좌), 교육을 담당하는 교무(사사), 자금의 출납 및 사무를 관장하는 재무(상좌) 등이 있었다는 것은 다양한 소임을 맡은 승려들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중초사에서 승악(현재의 관악산을 뜻하는 것으로 보임)에서 8월 6일 돌을 취하여, 28일에 두 개의 돌을 두 무리가 나누어 중초사로 운반을 시작하기 시작하였으며 9월 1일 중초사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중초사는 『동문선(東文選)』,『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흥지도서(興地圖書)』, 『가람고(伽藍考)』같은 문헌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고려후기에 이미 폐사된 사찰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