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8시 15분 별세했다. 향년 92세. 사진은 1989년 당시 민주당 김영삼 총재(오른쪽), 평민당 김대중 총재(가운데), 공화당 김종필 총재가 여권의 중간평가 조기강행 대책을 논의하기에 앞서 악수하는 모습.
연합뉴스
김종필은 1990년 10월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며 "나는 대통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김종필의 정치 수명이 노태우보다 현저히 길었다는 점이다. 김종필의 충고를 받은 노태우는 전두환 밑에서 철저히 2인자 처신을 하다가 전두환의 후계자가 되어 1987년 대선에서 김영삼, 김대중 양김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어서 김종필은 1990년 '3당 합당'으로 노태우, 김영삼과 함께 민자당을 탄생시켰다. 다음에 치러진 1992년 대선에서 노태우에 이어 김영삼이 대권을 쥐자 김종필은 예의 2인자를 자처하게 되었다. 그는 집권여당인 민자당의 대표최고위원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김종필은 정권 실세들의 냉대와 부패정치인 청산 작업으로 또다시 어려운 국면을 맞는다. 김종필은 1995년 김영삼의 내각제 약속 파기에 분개하면서 충청권 의원과 대구· 경북권 일부 의원들과 함께 당을 따로 차려 나가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만들었다.
김종필은 작정하고 충청도 지역감정을 선동했다. 그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창당대회에서 충청도 억양으로 "우리가 핫바지유? 우리는 핫바지가 아니란 말유"를 연발했다. 충청도민은 김종필에게 표를 몰아주었다.
자민련은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강원도를 포함, 충·남북 광역자치단체장을 석권하며 4명을 당선시켰다. 다음 해인 1996년 총선에서도 김종필은 예의 '핫바지' 행군을 멈추지 않았다. 결과 자민련은 무려 50석을 가지는 우량정당(?)으로 거듭날 수가 있었다.
1997년 다시 대선의 계절이 다가왔다. 김종필은 유력자로 부각한 한나라당 후보 이회창과 국민회의 후보 김대중의 대결구도 사이에 끼게 되었다. 김종필에게는 희망이 없는 게임이었다. 그는 아들의 석연찮은 병역 문제로 인기가 하강 국면에 접어든 이회창 대신 '지역등권론'을 내세우는 김대중을 선택, 이른바 'DJP 연합'을 성사시켜 김대중을 당선케 함으로써 다시 집권당의 2인자로 올라섰다.
"나이 70이 넘은 사람이 저물어 가는 사람이지 떠오르는 사람이냐. 다만 마무리할 때 서쪽 하늘이 황혼으로 벌겋게 물들어갔으면 하는 과욕이 남았을 뿐이다."2001년 4·13 총선 때 김종필은 이렇게 말했다. 김종필은 1997년 김대중과 연대할 때에도 내각제 개헌 약속을 받았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결과론으로만 볼 때 그는 김영삼과 김대중 모두에게 내각제 약속을 어김 당했다.
그렇다면 김종필은 왜 그토록 내각제에 집착했던 것일까? 그는 내각제 하에서 총리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직접선거로 뽑는 대통령제로서는 1인자가 될 수 없었다. 내각제 총리, 이것은 그가 추구한 필생의 목표였다. 그는 이런 방법으로 '영원한 2인자'라는 한계를 뛰어넘고 싶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야당인 한나라당의 인기가 오르고 충청도를 연고지로 내세우는 이회창이 한층 부각되면서 김종필의 충청도 영향력은 쇠퇴했다. 김종필의 자민련은 2000년 총선에서 17석으로 위축되었다. 그리고 2004년 총선에서는 고작 4석에 그쳐 비례대표에서 탈락, 낙선한 김종필은 또다시 '자의반 타의반'으로 정계를 떠나게 되었다.
되돌아가 조선시대의 인물 한명회는 어떠했을까? <조선왕조실록> 1487년 11월 14일 자에는 '한명회 졸기'가 있다. 실록에 의하면, "한명회는 젊어서 유학을 업(業)으로 삼아 학문을 이루지 못하고 불우하게 지냈고 세조의 대업에 제1공로자가 되어 10년 사이에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고 권세가 매우 성하여, 추부(趨附)하는 자가 많았고, 빈객이 문(門)에 가득하였으나, 응접하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여, 일시의 재상들이 그 문에서 많이 나왔지만 중국 사신에게 아부를 잘했다"고 되어 있다.
다시 처음에 논의한 관중으로 돌아가 그가 변절할 때 한 말을 다시 읽으며 생각해 보자.
"나는 공자 규 대신 종묘사직을 지킬 생각이오. 내가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경우로는 종묘가 불타고 사직이 파괴되고 제사가 끊어지는 세 가지 경우뿐이오. 이 경우라면 기꺼이 죽을 수 있소. 그러나 나는 이 세 가지 경우가 아니라면 기필코 살아남을 것이오. 내가 살아남아야만 제나라에 유리하오. 내가 죽으면 제나라에 불리하게 될 것이오."변절하는 사람치고 자기가 변절한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는다. 1990년 노태우의 민정당과 3당합당을 감행한 김영삼은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굴로 들어간다"고 자기를 합리화했다. 그러나 김영삼의 변절은 실패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것은 무엇보다 결과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원한 2인자'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한번 2인자는 영원히 1인자가 될 수 없다는 뜻을 내포한다. 그러나 나는 '한 번 2인자면 영원히 2인자'라는 말은 믿지 않는다. 미국에는 부통령을 하다가 대통령이 되어 성공한 인물이 많다. 러시아의 푸틴도 2인자였다가 1인자가 되었다. 문재인 대통령도 오랫동안 2인자였다. 다만 그들은 '변절'하지 않았다. 그들이 택한 것은 관중처럼 '변신'이었다.
하지만 김종필은 상황에 따라 끝임 없이 변절했다. 이런 점에서 김종필에게는 '영원한 2인자'라는 말이 적합하지 않다. 김종필에게는 차라리 한명회처럼 '영원한 책사'라는 말이 적합하다. 영원한 책사의 명복을 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
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공유하기
김종필, '변절한 책사'이지 '영원한 2인자'가 아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