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에 프랑스의 15살 고등학생이 Nature지에 실린 논문의 공저자로 등재된 적이 있다. 아버지를 포함하여 16명의 천문학자와 함께 이름을 올렸다. 소년의 이름은 닐 이바타. 5살에 수학과 물리학을 배우며 천재성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급기야 은하의 시각화 프로그램을 직접 만들며 논문에 참여하고는 과학 학술지의 최연소 연구자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이처럼 공저자의 전문적 기여도가 투명하게 드러난 경우라면, 고등학생이 아버지와 함께 논문의 공저자가 된다 한들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논문과 관련한 공부도 제안했지만, 이 역시 부모의 과도한 개입과는 거리가 멀다. 조 장관의 딸이나 나 대표의 아들은 닐 이바타의 사례와 차이가 크다. 이 둘의 경우엔 부모가 자녀의 학술 작업에 끼어들 만한 정당성이 부족했을뿐더러 학문적 이유도 전혀 없었다.
장제우
진짜 가져야 할 의문
개인의 책임과 자립을 강조하는 스웨덴의 개인주의는 국가의 재정을 통해 실현된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최연혁 교수의 저서에 소개된다. 최 교수가 일본에서 만났던 스웨덴 출신 한 유학생의 이야기다. 국제무역을 전공하는 이 유학생은 이미 중고등학교 시절 교환학생으로 미국, 프랑스, 스페인에 다녀왔고, 당시는 리츠메이칸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아버지의 무역회사를 더욱 키우겠다는 포부를 가진 이 청년에게 최 교수는 아버지의 지원을 받느냐고 물어보았다. 학생의 답은 이러하다.
"스웨덴에서는 18세가 되면 모든 것을 부모와 상의 없이 할 수 있습니다. 재정적인 부분도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죠. 중고등학교까지는 부모님이 교환학생 비용을 지원해 주셨지만, 이후부터는 재정도 계획도 제가 책임을 지지요. 공부를 하면서도 계속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대학등록금은 무상이니까 생활비를 버는 셈이죠. 또 스웨덴 학비융자국으로부터 3분의 1은 무상으로, 나머지는 장기 저리로 융자를 받습니다. 등록금이 비싼 나라로 유학을 간 학생들도 마음만 먹으면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 최연혁 교수의 저서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
이처럼 사회의 지원과 개인의 책임을 조화시키는 '개인주의 복지제도'는 개인과 국가 모두의 경쟁력을 높여준다. 최 교수의 말마따나 한국 역시 중고등학교 때부터 해외로 나갈 수 있는 외국어 교육정책과 대학생이 해외에서 공부할 수 있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조 장관과 나 원내대표의 자녀들처럼 잘 사는 일부만이 개별 자금으로 외국에서 교육을 받으며 그것을 특권화하는 게 아니라, 국가의 자금, 즉 세금으로 보편적 권리화하는 것이다. '기회는 평등할 것'이라는 참으로 공허했던 문구는 이런 과정을 통해 최대치로 실현된다.
이때 우리가 가져야 할 의문은 이런 것이다. '아무리 국가의 재정으로 교육 비용을 뒷받침하더라도 모든 국민이 그 혜택을 누리지는 않는다. 모두가 유학을 가고 고등교육을 받을 수는 없잖은가. 혜택을 입은 고학력자들은 온갖 이득을 얻겠지만, 그와 무관한 많은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이런 허점을 메우는 것이 또 세금이며 복지이다. 북유럽의 경우, 저소득층으로 갈수록 확실하게 더 많은 복지혜택이 제공되며 그 질과 양이 OECD 최고를 달린다. 저소득층까지도 한국보다 훨씬 많은 세금을 내며 부담이 크지만, 돌아가는 복지의 수준이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예컨대 살림살이에 대한 유럽통계청의 통계 중에는 '주거비를 무거운 부담으로 여기는지' 묻는 설문이 있다. 빈곤층의 경우 노르웨이가 15.9%, 스웨덴이 18.7%, 덴마크가 19.2%로 조사된다. 유럽 내 가장 낮은 수준이다. 가장 가난한 이들의 주거 문제를 일말의 결함도 없이 해결한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인상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이것이 순전히 복지 덕분은 아니지만, 복지가 아니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주거비가 무거운 부담인지 파악하는 조사에서 전 소득계층의 경우에는 노르웨이가 5.2%, 스웨덴이 7.2%, 덴마크가 9.0%라고 응답한다. 한편 '주거비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는 답변의 비중을 보면, 전 계층 기준으로 스웨덴이 64.2%, 노르웨이가 63.2%, 덴마크가 62.4%를 기록한다. 빈곤층 기준으로는 스웨덴이 47.6%, 덴마크가 46.3%, 노르웨이가 44.3%이다. 이러한 세 나라의 살림살이 관련 통계는 모두 유럽 내 가장 좋은 성적이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고르게 잘 산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 조사결과이다. - 유럽통계청
모두가 모두를 뒷받침해주기
덴마크의 보통 사람들은 '자기들이 낸 세금으로 변호사, 의사, 검사 등 사회의 모든 엘리트들을 공부시켰다'는 자부심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덴마크 국민이 이런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저소득층까지도 세금 부담을 크게 지는 나라이니만큼 자부심을 가져도 무방한 것이 사실이다.
가만 보면, 한국이야말로 저런 자부심이 꼭 필요한 나라가 아닌가 싶다. 한국은 세금의 활용도가 매우 낮은 나라이고 '내가 낸 세금으로 엘리트들을 공부시켰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또 엘리트들도 자기가 잘나고 스스로 고생해서 힘든 교육을 이수한 것이지, 사회의 지원으로, 수많은 동료시민들의 도움으로 그 자리에 올랐다는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지난 시간 우리는 이른바 사회지도층에서 온갖 불의가 분출하는 것을 지켜봐 왔다. 세금과 복지가 허술한 사회구조는 힘 있는 자들의 부조리를 만연하게 한 토양이었다. 동료 시민들의 연대적 지원으로 엘리트가 길러지는 사회에서는, 또 그 연대를 토대로 약자들의 처우를 향상시키는 사회에서는, 기저에 흐르는 도덕적 각성에 따라 권력자들의 일탈이 훨씬 잘 제어되기 마련이다.
'조국 사태'가 터진 이후 서울대와 고려대 학생들은 그의 사퇴를 촉구하며 시위에 나섰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런 일이 벌어지는 사회구조가 무엇인지, 자신이나 조국 가족뿐 아니라 모두가 잘 사는 길은 무엇인지 고민해본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내 앞길에 걸리적거리는 요소만 없애버리고 싶다는 '한국식 공정'과 '한국식 개인주의'가 나부낄 따름이다.
조국과 기성세대의 악습을 질타하는 SK 시위대의 분노에 나 역시 많은 부분 동감한다. 그러나 조국과 마찬가지로 사회 속의 자신을 성찰하지 않는 이들의 목소리는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학벌의 위력이 과대한 각자도생의 한국에서, 구세대 엘리트 조국의 허물을 답습해가는 것이 바로 이들 차세대 엘리트들이다. 이들은 공정성 수호를 내세우지만, 자신들의 위치가 곧 불공정의 상징임을 자각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성장한 엘리트들이 차후 기성세대를 대체한들, 여태껏 그래왔듯 한국 사회의 공정성이 향상되기는 어렵다.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미래는 모든 시민이 사회적 지위와 무관하게 서로 긴밀한 도움을 주고받는 사회이다. 이런 세상에서라야 나뿐 아니라 모든 구성원이 억울함을 느끼지 않고 공정하게 고르게 잘 살 수 있다. 사회제도적으로 모두가 모두를 뒷받침해주고, 인간 내면의 선의가 구현되는 나라. 나는 한국 사회가 이런 방향으로 갈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