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피다> 포스터
장윤미
올 해는 제주4.3 71주년이다. 하지만 반도의 남쪽은 71년 동안 여전하다. 낮과 밤, 오른쪽과 왼쪽, 두 개의 세상만 존재하는 듯 보인다. 사이의 사람들은, 기록되지 않는 사람들은 역사적 의미가 없는 걸까. 서초동도 광화문도 아닌 곳에서 조용하게 쌓아 올린, 작은 바람에도 허탈하게 흩날려버릴 꽃잎들을 보기 위해 '사이'에서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 일상에서 지하철을 타지 않는 터라(도시를 벗어나 살고 있다) 오랜만에 마주한 퇴근시간 9호선은 정말 힘들었다.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사전 공지되었던 오프닝 시간 7시가 지나자 마음이 조급했다. 행여나 어떤 장면과 말들을 놓칠까 부지런히 움직였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했을 때의 안도감. 오프닝에 맞춰진 작가와의 대화 라든지, 모두가 기획자의 말을 경청하는 그런 광경은 없었다. 네 명의 작가들은 관객에게 둘러 쌓여 있었지만, 익히 보아왔던 하나의 큰 원이 아닌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모이고 흩어지는 작고 일시적인 원이었다. 누구 하나 같은 시간에 몰려 오지 않았으므로, 작가와의 대화와 기획자의 말은 늦은 9시까지 지속되었다.
관객들은 전시를 보고 전시 공간 외부에 준비된 작은 다과회에 참석해서 자연스럽게 인사하고 대화를 나눴다. 아, 오프닝을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보통 전시 개막 행사는 잘 기억나지 않는 말 잔치를 하고, 관계자들과 인사를 나누다가 급히 식사(?) 장소로 이동하기 때문에 관람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동백꽃 피다>의 오프닝은 신선했다. 작품을 충분히 관람할 수 있었고, 작가들과 깊게 대화 나눴으며, 전시 공간에서 오랜 시간 머물 수 있었다. 신선한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인사를 나누는 관계자들이 모두 20, 30대의 젊은 층이었다는 것. 기성 제도를 경험하며 불편했던 것들을 개선하고자 했거나 혹은 주어진 환경을 섬세하게 고려하여 기획된 아주 작은 시도가 천천히 조용하게 마음에 닿았다.
'제0세계'를 기획하고 현재 구성원들에게 참여를 제안한 박선영 작가는 예술공간 이아(아래 이아) 레지던시(제주)에 입주했을 때 4.3을 처음 접했다. 그 때가 2017년이니, 벌써 3년 전이다. 이후 작년 '4.3 70주년 해원상생큰굿' 현장에서 고승욱 박정근 작가와 함께 4.3유족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옛날사진관>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유족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 나눴던 일주일 간의 경험이 감정의 변화를 일으켰고, 초상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4.3유족 초상화 시리즈 작업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고 26회 4.3미술제 <경야>(2019, 제주), <섬의 얼굴>(2019, 서울), <100 마이너스 30>(2018, 제주), <섬의 얼굴>(2019, 제주)에서 다양한 변주로 전시되었다. 스케치도 없이 일필휘지로 그려 넣은 유족들의 얼굴에는 생명력이 가득하다. 잘 섞이지 않을 것 같은 다양한 원색들이 서로 어울려 감탄을 자아낸다. 특히 이번 전시에 처음 발표된 "순출삼촌" 드로잉 영상은 관객들의 시선을 붙잡는 매력이 있다.
평소 '초상화'와 '기억'을 매개로 작업을 해왔던 김준한 작가는 겹겹이 배접된 한지 위에 그림을 그린다. 이후 그 '겹'들을 분리해서 전시 중이다. 당연하게도 붓이 직접적으로 닿았던 층의 이미지는 선명하고, 아래 층으로 갈수록 희미해진다. 관객이 처음 마주하는 작품들은 가장 흐릿한 그림들인데, 처음엔 '추상화'라고 생각했다. 한 걸음씩 내딛을 수록 점점 선명한 이미지가 등장하고, 이내 같은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참 탁월한 구성이다. 경험과 기억의 성격을 명쾌하고 직관적으로 알게 해준다. 아픈 역사와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형광, 핑크색들로 4.3평화기념관의 '백비'를 그렸다. 익숙한 것을 새롭게 볼 수 있도록 유도하는 장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