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하는 하승수 정치개혁연합 집행위원장10일 서울 종로구 운현하늘빌딩에서 열린 '정치개혁연합 창당일정 발표 및 선거연합정당 기조에 관한 기자회견'에서 하승수 집행위원장(왼쪽)이 발언하고 있다. 왼쪽 두번째부터 신필균, 조성우, 류종열 공동창당준비위원장.
연합뉴스
정치개혁연합이라는 정당을 창당하고 비례연합정당을 이끌어내겠다는 '시민사회 원로 선생님'들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 이 글을 씁니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정세 속에 매일 바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혹 여유가 된다면 읽어주십시오.
'꼼수에 꼼수로 대응하는 것이 옳은가'와 같은 원칙론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선생님들께서 준비하고 계신 기획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회의와 기획 이후에 올 냉소주의에 대한 우려를 전하고 싶습니다.
민주당을 전적으로 믿습니까?
정치개혁연합의 기획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선 비례정당 만들지 않겠다고 공언한 더불어민주당에게 시민사회가 주도한다는 명분을 줌으로써 참여를 유도합니다. 그리고 자력으로 의회에 진출하기 어려운 군소정당에게는 분명하게 의석을 획득할 수 있는 비례순번을 줌으로써 동참을 제안합니다.
더불어민주당과 군소정당들은 영향력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시민사회라는 중립세력이 중재하고, 정치적 지향의 차이는 '선거제도 개혁 취지 수호'와 '반 미래통합당'이라는 최대공약수로 극복하는 겁니다. 또한 이 모든 과정에 실망할 시민들은 각자 선거에 임할 경우 미래통합당과 미래한국당이 국회 의석 과반을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강조함으로써 설득하겠다는 것이고요.
생각대로만 된다면 참 훌륭한 시나리오입니다만, 여기에는 논리적 함정이 존재합니다. 더불어민주당이 시민사회와 군소정당에 주도권을 넘겨줘야 한다는 전제가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비례민주당'인 셈이고, 군소정당들이 참여할 이유도 줄어드니까요.
그런데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사무총장이 15일 국회 기자간담회에서 한 말들은 이 전제를 흔듭니다. 윤 총장은 "남은 4년간 정부를 통해서 정책을 실현하는 데 합의할 수 있는 정당들"(
링크)에 의사를 타진했다면서 18일까지는 결정돼야 함께 갈 수 있다고 못박았죠. 이는 이 연합정당의 주도권을 민주당이 쥐겠다는 뜻을 명백히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들께서도 논평을 발표하셨더군요. "민주당의 시나리오대로 모든 과정을 관리해 가려는 태도를 내려놓아야 할 것"(
링크)이라고요. 정말 이럴 줄 모르셨습니까? 첫 걸음부터 이런데, 비례명부 작성 과정에서는 정말로 민주당은 약속대로 "민주당 후보는 후순위에 7명"으로 배치하는 데 동의할까요?
지금 선거제도를 만들어오는 과정의 최전선에 계셨던 하승수 집행위원장께서는 민주당이 중요 국면에서 어떻게 이익을 관철해 왔는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합의된 협상안을 자꾸만 뒤집는 민주당 지도부에 대해 "거의 안하무인의 행태(2019년 12월 19일,
투데이신문)"라고 비판하신 적도 있었죠. 미래한국당을 탄생시킨 지금의 복잡한 선거제도는 기존에 합의된 선거제도 개혁안을 민주당이 조금씩 후퇴시키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생님들의 기획이 매우 불안하고 순진한 믿음 위에 구축된 것이라고 봅니다. 결국 민주당의 명분만 쌓아주고 팽 당하지는 않을지 매우 우려됩니다. 우려가 단지 우려에 그치기만을 바랍니다.
민주당이 정한 기한이 다가오면서 점점 많은 군소정당들이 비례연합정당 참여로 입장을 전환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미래당, 녹색당, 시대전환, 기본소득당이 참여를 확정했고, 민중당 등도 내부적으로 참여 쪽으로 입장을 정리해가고 있다고 하죠. 여기에 열린민주당, 시민을 위하여 등도 계속 고민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참여주체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연합은 깨질 가능성이 큽니다. 누가 몇 명을 당선권에 배치할 것인가를 두고 군소정당들이 갈등을 키우겠죠. 그 당의 얼굴인 '1번'은 누가 하나요? 민주당은 이들 모두를 '합의할 수 있는 정당'들로 여길까요?
프레임만 잘 짜서 기획하면 된다고 믿으시겠지만, 정치란 것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평생 정치 한 번 안 해본 사람들도 다 압니다. 그런 프레임 대결은 서로 영향력이 비등한 세력들 사이에서나 통하는 일이죠.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차이 나는 집단끼리 경쟁할 때는 프레임의 정교함보다 영향력 그 자체가 판세를 결정하곤 합니다. 선생님들의 영향력이 집권여당의 그것과 비등하다고 믿으시는지요.
정치혐오는 상관없습니까?
비례연합정당이 실현되어도 문제입니다. 저는 이 기획이 필연적으로 한국 사회의 정치혐오를 강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공당의 대표라는 사람들이, 한 명 한 명이 헌법기관이라는 사람들이 TV에 나와 직접 한 공언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는 걸 지켜보면서 정치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하게 됩니다. 정치적 신의란 무엇인가, 공언이란 무엇인가, 뭐 그런 질문들을 가슴 깊이 쌓아두고 있습니다.
오늘날 정치혐오는 냉소주의와 동의어입니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을 당연시한다는 생각이 청년들에게 뿌리 깊습니다. 이는 일베가 한창 창궐하던 즈음 그들이 가장 앞장서 내세운 논리체계(?)이기도 합니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10년간 민주당이 한미FTA를 추진하는 등 신자유주의 정책에 앞장서놓고, 정권이 바뀌자 돌연 한미FTA 반대 투쟁을 벌였다는 겁니다.
물론 이러한 입장 뒤집기는 미래통합당의 전신들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일베가 보기에 이들은 그냥 더러운 걸 인정하는 집단인데 민주당은 고결한 척 하는 게 싫다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