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지는 남녀 애정의 징표, 음양의 화합을 뜻하는 패물로써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박정하
"반지 샘플을 만들 땐 제 와이프 손가락 크기에 맞춰서 만들어요. 그리고 진짜 귀한 재료로 만든 건 아내한테, 팔지 말고 가지라고 하죠.(웃음)"
아내는 열정의 원천이다. 그 에너지는 엄익평을 옥공에서 아티스트로, 그리고 옥장에서 무형문화재로 만들었다. 옥을 처음으로 접한 건 중학교 2학년, 학교를 그만두면서다. 둘째 형의 소개로 들어간 옥공장에서 스승 홍종호를 만나고, 공장이 스승의 지인에게 넘어가면서 공장을 그만두었다. 그는 용기를 냈다. 상도동 달동네 언덕배기 버려진 원두막에 중고기계를 들여와 옥공장을 차렸다. 그의 나이 열아홉이었다.
아는 사람마저도 헛웃음 쳤다. 제대로 된 기계도 없는 상황에 삼 년차 옥공의 공장 경영이라니. 지금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일이 분명했다. 그래서 이를 악물었다. 그는 중학교 중퇴에 미술이나 예술에 관해 제대로 배운 적도 없었다. 당시 그에게 독립은 옥공으로써 자신의 앞날을 점쳐볼 만한 중요한 시도였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그의 공장엔 공구도 부족했다. 그럼에도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처음 시도한 백옥향로 내부를 다듬을 공구가 없었다. 공구를 살 돈도 없고, 그렇다고 그만둘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 방법밖에 없었어요. 일단, 살 수 없다면 직접 만들어 보기라도 해야 했죠. 공구 만들 재료가 2만 4000원이었고 당시 월급이 4000원 정도였으니까, 한 육 개월 치 월급을 털어서 직접 만들었죠."
세 달을 거쳐 탄생한 향로를 마주했을 때, 그는 옥공으로서 자긍심을 느꼈다. 그 이후 공장은 자리를 잡아갔다. 19살, 옥공장을 차렸던 패기는 나이가 들면서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다음 도전 과제는 한국 고유의 옥공예 작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옥 문화는 중국에서 시작돼 한국으로 이어졌다. 비록 중국에서 시작된 문화지만, 우리 조상은 중국과 다른 우리만의 옥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시장 상황은 달랐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고백했다.
"한... 80년 중반까지만 해도, 중국 옥공예 양식을 답습하는 데 그쳤죠. 뭐 제대로 배운 것도 없고 그러니까요. 게다가 사람들은 복잡한 문양의 옥 제품을 선호했으니까 저절로 모방하게 되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