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전하지 못한 진심, 복자에게

[서평] 김금희 작가가 전하는 잊지 말자는 마음, '복자에게'

등록 2021.08.18 15:50수정 2021.08.18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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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금희 <복자에게>
김금희 <복자에게>문학동네
 
많은 기억들이 흔들리고 부유했다. 기억을 되살리는 건 그렇게 하없이 풍성해지는 일인 듯했다. 통제를 벗어난 많은 것들이 나의 재단을 훼방하고 흐트러뜨려 놓은 상태.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여름을 닮은 시간들이었다. (p. 167)

김금희 작가는 첫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에서 '우린 여기 존재한다'고 말했다. 두 번째 장편소설 <복자에게>에선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지만, 남은 삶을 꿋꿋이 살아낼 것'이란 한층 깊어진 메시지를 전한다. 

소설은 십대의 영초롱과 성인이 된 영초롱의 사연을 교차 편집해 데칼코마니처럼 포갠다. 제주 여성의 강인한 의지를 '복자'란 캐릭터에 투영할 뿐만 아니라 영초롱의 편견을 벗기는 역할을 하는 동창 '고오세', 영초롱의 롤모델 '양 선배' 등을 등장시켜 느슨한 연대의 손길을 건넨다. 


작가가 제주에 머물며 보고 느꼈던 풍경은 모티프로 나타난다. 영초롱과 복자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던 '고고리 섬'은 푸른 청보리가 매력적인 '가파도'가 떠오른다. 중요 사건으로 등장하는 '영광의료원 산재소송'은 '제주의료원 산재소송'과 겹친다. 그 밖에도 영초롱이 찾았던 식당과 제주 시내 모습도 제주도민이라면 '아 그곳이구나'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선명히 묘사된다. 

기억의 시작, 유년의 상처

1999년 부모의 사업 실패로 제주에 내려와야 했던 열세 살 '이영초롱'은 제주 본섬에서 한 번 더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고고리 섬'에서 고모와 함께 지낸다. 부모에 대한 원망과 세상에 대한 분노, 아물지 않은 상처까지 품은 소녀는 견고한 담을 쌓는다.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는 길에 만난 또래 아이 복자는 할망신에게 '너라는 사람이 여기 와있다고 인사해야 한다'며 공동체로 끌어당긴다. 복자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는 친구가 된다. 어른들 싸움에 휘말려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전까지는.

고고리 섬에 상처를 버린 채, 영초롱은 판사가 된다. 원고와 피고의 사연이 종이 몇 장으로 평면화되는 삶에 지친 어느 날, 그녀는 법정에서 욕설을 내뱉고 제주로 좌천된다. 그리고 잊고 있던 상처, 복자와 재회한다.


영초롱에게 유년의 상처는 '버리고 온 것'이다. 복자의 산재소송은 그녀가 버린 기억과 주워 담게 만든다. 복자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 법관으로 겪었던 깊은 회의감은 복자의 승소를 위한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복자는 "내 평생의 부탁"이라며 재판에서 빠져달라고 호소한다. 영초롱은 열세 살로 돌아가 "더이상 복자가 나를 믿지 않는다"고 오해한다. 판사를 사직해 한국을 떠난 후, 복자가 자신을 위해 그런 선택을 했다는 걸 깨닫는다.


수신, 복자에게 그리고 나의 유년의 날들에
 
가장 먼저 자판으로 친 말도 복자에게, 였고 가장 빈번하게 쓴 말도 복자에게, 였다. (p. 100)

영초롱은 복자에게 "아무리 마음을 보내도 가닿지 못하던, 아무리 누군가의 마음을 수신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던, 차마 복자에게 안녕, 이라고 말을 건넬 수 없어 아프던 그 유년의 날들로(p. 126)" 부치지 못한 편지를 쓴다. "생존자일 수 있는 시간을, 자신을 내보이는 것만으로 골목의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시간을, 그렇게 해서 모두를 생존자로 만드는 시간을(p. 230)" 기록한다.

소송은 복자의 힘으로 승소한다. 같은 의료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야 했던 유가족들의 '사망진단서'가 복자를 살린다. 영초롱은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제주의 날카로운 바람에 맞선 '고복자'에게, '내 친구'에게, '한 여성'에게.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가 직접 복자에게 전해줄 편지를 쓴다. 
 
다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이라도 냉동고에 넣으면 얼마든지 다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이 된다고 말할 줄 알았던 현명한 나의 친구, 복자에게.

복자야,
우체통은 시청역 4번 출구 앞에 정말 있어. 거기에 그게 있다는 건 누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사실이야.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자마자 그곳에서 이 편지를 부칠 거야. 그때까지 다만, 요망지게, 안녕해. (p. 236)

추신, 앙고라주: 잊지 말라는 신호

김금희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삶이 계속되는 한 우리의 실패는 아프게도 계속되겠지만 그것이 삶 자체의 실패가 되게는 하지 말자고,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선언보다 필요한 것은 그조차도 용인하면서 계속되는 삶이라고 다짐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는지도 모르겠다(p. 242)"고 고백한다.

앙고라주(제주방언으로 '안 알려준다'라는 뜻)라는 영초롱의 별명처럼 우리도 '앙고라주'는 마음이 있다. 이는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 않았다"며 고백하던 <경애의 마음>과 맞닿아 있다. 

결국 삶에는 군중으로 묶을 수 없는 개개인의 마음이 있다. 이건 실패가 아니다. 잊지 말라는 신호다. 복자의 마음을 보듬으며 스스로 서 있을 수 있게 된 영초롱의 모습은 '-에게' 앞에 붙는 수신인, '과거의 나'에게 보내는 희망이다. 
덧붙이는 글 네이버카페 및 블로그, 브런치에도 서평이 게시됩니다.

복자에게

김금희 (지은이),
문학동네, 2020


#복자에게 #김금희 #문학동네 #국내소설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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