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이천민주화기념관 내 전시물
고상만
잔혹한 고문자들의 선한 얼굴?
그런데 얼굴 안 보고 나누는 전화 통화에서는 난폭한 언사로 좌충우돌했지만 막상 조사실로 입실하면 또 달랐다. 정당한 사유 없이 불출석할 경우 의문사위 특별법에 의거, '과태료 1000만 원'을 부과할 수 있다는 말에 당시 전두환과 노태우를 빼고는 전부 출석했다. 그래서 옥신각신 끝에 출석한 그들을 마주하는 조사실로 들어서면서 조사관들 역시 남다른 각오를 다지곤 했다. 절대 밀리지 않겠다는 각오 말이다. 그런데 막상 마주하게 된 그들은 달랐다.
상상 속에서 험상궂은 인상을 가졌을 것이라고 예단한, 아니 악마와 같은 표정일 것이라 믿었던 그들 대부분은 너무나 선량한 얼굴이었다. 그들에 의해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던 피해자 증언으로 상상했던 괴물은 거기에 없었던 것이다. 마치 이웃집 마음씨 착한 할아버지 같은 인상. 내 장인어른 같고, 작은 아버지 같으며, 큰 아버지의 인자한 웃음을 담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들이 정말 진정서에 담긴 그 잔혹한 행위를 했다는 것이 쉽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사건속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그들의 얼굴 역시 변해갔다. 과거 그들의 얼굴이 조금씩 보이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 그러니까 1960년대 이후 박정희 유신 악행으로 시작하여 전두환 군부독재를 관통하던 시대에 그들이 고문실에서 만들어 낸 피해자들의 절규와 고통을 바라보던 그 얼굴 말이다.
그들은 서슴없이 말했다. 자신이 수사했던 그들은 분명 빨갱이였다고.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그 당시 권총도 봤고, 난수표도 확보했으며, 수시로 북에 보고한 사실과 대한민국 정부를 타도하기 위한 음모를 확인했고 그랬으니 법정에서도 유죄 선고를 받은 것이 확실한 것 아니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젊은 날 청춘을 바쳐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애국을 오늘날 김대중 정부 하에서 다시 조사하는 의문사위를 비난하고 싶어 안달하는 눈빛을 반짝이곤 했다.
하지만 '진실은 매서운 회초리'와 같다. 그들이 말하는 권총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난수표도, 북과 교신했다는 무전기 역시 그들은 단 한 번도 확보한 적이 없었다. 음모는 그저 그들이 고문을 통해 작성한 조서에서만 존재할 뿐 증거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명백한 진실 앞에서도 그들 대부분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신앙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역시 그들이 진실로 반성하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니 실망할 일도 사실 없었다. 우리는 그저 그들이 말하는 '증거 없는 확신을 우리가 확인한 증거로서' 반박하면 될 뿐이었다. 그것이 일상적인 조사 패턴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다르지 않은 줄다리기를 예상하고 조사실로 입실했다. 기억하기에 칠십 대가 넘어 보이는 중앙정보부 출신 수사관과 마주한 날이었다. 그는 자신이 중앙정보부에 근무하면서 담당했던 어떤 사건에 대해 자신의 기억을 진술했다.
그런데 남달랐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이 당시에 조사했던 그 사건은 '사실이 아니었다'며 인정했다. 의외였다. 그래서 물어봤다.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언제 처음 알았냐고. 그런데 돌아온 답이 너무도 뜻밖이었다. 이번에 의문사위에서 보내온 '출석 요구서'를 받고 나서야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 말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아 되물었다. 사건을 수사했던 처음부터 이미 알았던지, 아니면 수사 도중이나 종결 직후에 알았다면 모를까 아무 설명도 없는 한 장짜리 '출석 요구서'를 보냈을 뿐인데 뭘 보고 자신이 그때 담당한 사건이 조작이었음을 깨달았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이었다. 그러자 그는 답했다.
"아마 처음부터 알고는 있었겠지요. 그런데 그때는 전혀 의심하지 않은 거지요. 그때는 그게 애국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니 한번 정해진 목표 앞에서 어떻게 해서든 빨리 자백을 받는 것, 그것이 고문이든 그보다 더한 방법이든 애국이라고 믿은 겁니다.
간첩이라는 증거가 없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간첩이니까 당연히 증거를 남기지 않는다고 믿었으니까. 그런데 이번에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던 겁니다. 제가 잘못 살아왔구나 깨달았습니다. 출석 요구서를 받는 날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러니 인생 말미에 여기로 불려 와 이렇게 죄인이 되어 조사를 받고 있는 거지요. 죄송합니다."
책 <조작된 간첩들-침묵하지 않을 의무>(아래 <조작된 간첩들>)는 바로 이런 이야기들을 사실에 기초하여 대중이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준 책이다. 지은이 김성수 박사는 필자와 오래된 인연을 가진 분이다. 1960년생인 김성수 박사가 영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귀국한 직후인 2004년 1월, 내가 몸담고 있던 '의문사위 보고서팀'으로 합류한 이래 지금까지 깊은 교우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런 김성수 박사가 그간 '의문사위'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아래 '진실위')에서 조사해 온 사건들을 정리하여 한 권의 책으로 묶어냈다. 내가 조사관으로 일하며 경험했던 '익숙한, 그러면서도 끝내 익숙할 수 없는' 여러 실화들이 <조작된 간첩들>로 재탄생한 것이다.
이 책을 두고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우리가 남이 당한 특별한 비극을 왜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하냐고. 또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다 좋은데 너무 잔인하고 끔찍해서 책을 읽고 싶지는 않다고. 하지만 바로 그런 외면과 방관이 결국 누구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인지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