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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암고 당직실의 얼음...고 채현국 이사장님을 추억하며

채현국 이사장님 첫 기일에 보내는 편지... 그를 기억하며 봄을 맞는 효암고와 개운중

등록 2022.03.28 10:01수정 2022.03.2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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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현국 이사장의 생전 모습
채현국 이사장의 생전 모습조진태
 
오는 4월 2일, 할배 채현국 이사장이 세상을 떠난지 1주기가 됩니다.

이제 할배의 첫 기일에, 생전에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학교 소식을 전하려 합니다.여전히 명예 이사장님을 기억하는 경남 양산시의 효암고와 개운중에는 봄꽃이 몽우리를 짓고, 서늘한 추위속에 피었던 교정의 매화는, 이제 지고 있습니다. 그 자리를 목련이 채우고 있습니다. 학생들과, 앞다투어 피어나려는 꽃송이가 눈부십니다.
 
 효암고 바위, 세상살이에 대한 고인의 조언
효암고 바위, 세상살이에 대한 고인의 조언조진태
 
#  효암고

학생들은 일상처럼 학교에 오고, 가끔 부모님들이 아이를 태우고 오십니다. 출근길에 짬을 내서 오시겠지요. 학생과 교사, 학부모가 어울려 교문에서 맞절을 합니다. 그 모습을 한 바위가 묵묵히 지켜 봅니다. 학교를 믿고 아무렇지도 않게 아이를 맡기는 효암의 암은 말 그대로 바위입니다. 학생들은 매일 등굣길에 할배가 아낀 바위를 알 듯 모를 듯 지나칩니다. 핸드폰을 보면서도 돌계단을 용케 잘 오르내립니다.

할배가 교명의 바로 뒤에 세운 커다란 바위는, 교명 '효암'의 의미를 풀어준 느낌을 받습니다. 효암은 '새벽 바위'입니다. 새벽별 효성이 긴 밤을 지새고, 여명을 알린다면, 효암은 지상에서 그 일을 해낸다고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명 뒤편에는 새벽 바위의 역할이 쓰여 있습니다. 바로 '쓴 맛이 사는 맛'이라는 할배의 소신입니다. 왜 하필이면 쓴 맛이 사는 맛인가?, 단맛이 있는데, 막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왜 쓴맛의 가치를 일깨우려 했는지 많이 궁금합니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모순적이 어법입니다. 말은 기억을 통해 후세에게 유전됩니다. 나의 단 맛이 상대의 쓴 맛이 된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 자각할 때,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고, 쓴 맛을 맛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타인을 배려하기 어렵다고 할배가 말씀하셨지요.

밤을 지샌 자가 비로소 새벽을 알릴 자격이 있겠지요. '배움과 존중이 있는 건강한 공동체'라는 효암고의 교육 목표와도 통하는 대목입니다. 이 때의 존중은 타인, 그리고 정확히는 나보다 조금 더 어려운 이웃을 향하고 있습니다. 바위의 한 구퉁이는 다소 무너져 있습니다. 애초 상처 난 바위를 재활용했다고 합니다. 바위도 할배처럼 쓴 맛을 경험한 느낌입니다.
 
 개운중 도서관의 탁본
개운중 도서관의 탁본조진태
 
# 개운중

개운중학교 복도와 도서관에는 할배가 아끼던 족자와 그림, 고서들이 여전히 가득합니다. 지인들에게 할배가 '강요성 협찬'을 받았다고 하지요. 이순신 벽파진 승첩비 탁본을 비롯해, 판화, 산수화들이 심심치 않게 걸려 있습니다. 그리고 도서관 서고에는 할배가 기증한 한국과 중국의 고전서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습니다. 탁본과 그림들은 복도와 도서관 벽에 아무렇지도 않게 걸려 있습니다. 마치 박물관을 연상케합니다.

언제가 한 선생님이 물었다고 합니다.
"이런 고서와 탁본, 고전서가 중학생들에게 어렵지는 않겠습니까?"
할배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어린 시절, 이런 것들은 무심히 보았다는 것이, 사람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누구도 모릅니다. 그저 그 학생들의 몫입니다. 맡기시면 됩니다."
그래도 근심이 그치지 않습니다.
"혹시 학생들이 낙서라도 하면 어쩌지요."
"귀한 것은 천하게 두면,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두면, 학생이 귀하게 될 수 있습니다. 낙서 좀 하면 어떻습니까."


할배 다운 역설의 화법입니다. 모순에서 출발하는 역설은 가치의 충돌에서 비롯되는 긴장을 통해 사람의 생각을 넓히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개운중 교장선생님은 이를 '할배 정신'이라고 추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할배가 기증한 그림 옆에, 학생들이 협업으로 그린 대형 벽화가 걸려 있습니다. 학생들이 각자 그린 그림이 한데 뭉쳐, 전체 그림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아주 같으면서, 매우 다른 매력을 지닌 개운중의 명물입니다.
 
할배, 평온히 가십시요. 세상은 잠시 빌린 공간이라고 말하셨지요.
할배, 평온히 가십시요.세상은 잠시 빌린 공간이라고 말하셨지요.조진태
 
# 효암학원과 당직실

효암학원은 효암고, 개운중을 유지 경영하는 '가난한 사립재단'입니다. 늘 사립학교 분담금에 시달립니다. 그렇지만 학교 운영은 얼음처럼 투명합니다. 교사 채용은 일찍부터 필기시험을 교육청에 위탁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수업실습 평가와 교양 및 소양, 심층면접은 일정부터 문항출제, 평가까지 모두 교사들이 주도합니다. 이사장은 아예 점수를 주지 않습니다. 한 번도 그 결정을 뒤집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선발된 교사들에게 할배는 늘 책 좀 읽으라고 윽박질렀다고 합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교무실에서 마치 환성처럼 들린다고 한 선생님이 추억합니다. 교사들은 입사하면서, 학교의 주인은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을 싹틔운다고 합니다. 양산시의 '가난한 명문 사학의 전통'을 할배의 목소리가 만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교직원중, 이사장과 임원의 친인척은 한 사람도 고용되지 않아, 개정된 사립학교법의 명단 공개 조항에 자유롭습니다.

효암고 당직실에 들러 봅니다. 밤샘 근무한 당직실 선생님이 책상에 얼음을 수북하게 쌓아 놓고 있습니다. 추위가 가시지 않은 때부터, 당직실을 지나며 보아온 풍경입니다. 제법 연세 깊으신데, 설마, 얼어 죽어도 아이스인지, 의아한 마음에 왜 얼음을 쌓아 두시냐고 물었습니다. 대답은 이랬습니다.

"고인이신 명예 이사장님이 얼음을 아주 좋아하시는 분인데, 당직 근무중에 학교를 순찰하고 나면,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얼음을 올려 놓고 있는데, 제가 심심할 때 할배와 대화하고 싶어서 올려 놓습니다."

벌써 일년째라고 합니다. 얼음으로 추모하는 3년상이랍니다. 할배, 얼음이 정말 뜨겁습니다.
#효암고 #개운중 #채현국 #채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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