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쪽짜리 자연인의 집
표명렬
건축허가 문제 등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부모님, 조부님을 비롯해 5대 조까지의 조상님들을 모신 산소가 바라다 보이는 곳, 100평이 채 되지 않은 터에 아주 작은 원룸 집을 지었다. 그리고 2주 전에 이곳으로 내려왔다.
우리가 선조님들 계신 묘소 곁으로 내려간다는 소문을 듣고서 "설마 그 나이에?", "고속버스 타고 5시간 걸리는 그 먼 곳에, 도대체 몇 번이나 오갈 수 있다고? 용감무쌍 무모막심 하다"고들 했다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심지어 "영구차에 실려 갔다더라?"는 너무 심한 농담도 있었다 한다. 하기야 그런 풍문은 오히려 장수케 만들어 준다는 말이 예부터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니 결코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아내는 철학자 '소로'와 법정스님의 '무소유' 철학 등 자연친화적인 생각과 삶을 좋아해왔다. TV 프로그램 '자연의 철학자'를 은근히 기다리는 열성 팬이다. 그는 농사짓는 소도시의 시골집에서 태어나 중학생 때까지의 유소녀기를 거기서 보냈다.
비오는 날이면, 친구들과 이 집 저 집 어울려 다니며 채송화, 봉숭아, 분꽃 등 모종을 나누어 가지며 바꾸기도 하여 화단에 정성껏 심곤 했다. 철따라 마당 곳곳에 꽃씨를 뿌리고 예쁘게 가꾸어 늘 할아버지로부터 칭찬 받았다고 한다.
지금도 들꽃 군락 길을 지나거나 화사한 꽃밭을 만나게 되면 걸음을 멈춰 감탄사를 연발한다. 오래 전 제주도의 유체꽃밭, 고창의 청보리밭에 갔을 때도 탄성 지르며 좋아했다.
그는 어렸을 적에 보아온 자연의 아름다운 풍광과 풀벌레들의 속삭임을 가슴속 깊이 새겨 못 잊다가 드디어 이를 현실화 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은 것이다. 물론 장손 며느리로서, 선산을 돌보아야 한다는 의무감도 작용했겠지만 어떻든 이번 시골집은 전적으로 아내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작품이다. 아내의 건강회복을 바라는 나의 간절한 소망도 뒷받침 됐다 할 수 있다. 그래서 집 이름을 아내의 가톨릭 본명대로 '데레사 하우스'로 명명했다.
그간 우리는 TV를 통해서 각양각색 여러 이유들을 안고서 세상과 완전 절연, 깊은 산속에 들어와 생활하고 있는 자연인들을 접할 수 있었다. 그들의 생각과 살아가는 방식에는 공통점이 있어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부럽기도 했다. 한번은 내가 불쑥 "우리 당장 산으로 들어갑시다" 한 적도 있었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우리의 삶을 크게 바꾸지 않고서도 자연인들이 향유하고 있는 것과 같은 그런 참 자유와 행복을 누려, 정신적으로는 물론, 육체적 치유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길을 찾자고 해서 '절반의, 반쪽짜리 자연인'이 되기로 합의했다.
사실이지 나는 아내와 달리, 자연친화적이 아니었다. 자연을 좋아하지 않았다. 혈기왕성 한창 젊은 시절을 군대생활로 보냈던 영향이 큰 것 같다. 내가 역임했던 최전방 초소의 소대장, 연대작전장교, 비무장지대(DMZ)의 중대장, 그 어느 직책에서나 자연은 귀찮은 존재에 불과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그런 여유의 정서가 없었다. 울창한 산림과 강물 호수 구릉 등 모든 자연은 극복하고 지배해야만 하는 '장애물'로만 인식되어 왔다. 피하거나 파쇄해 버려야 할 부담스러운 대상이었다.
판초우의 지붕삼아 며칠 밤을 지새웠던 울진·삼척지역 침투간첩 색출 작전의 경험으로 설악산과 오색약수터 일대는 오래도록 지긋지긋한 느낌으로 각인돼 있었다. 어떤 경치를 대하더라도 "아하! 참 좋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특히 1965년도 전투부대 월남파병 제1진 맹호부대 소총중대 요원으로 파병되어 1년 동안 정글을 누비는 수많은 전투를 경험하면서 자연은 증오와 회피의 골치 아픈 공포적 대상일 뿐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자연으로 돌아가 영원히 함께해야만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서일까? 자연의 광대무변, 영구 장엄함에 겁먹어서일까? 내가 자연을 좋아하게 되다니. 아니다. 이는 순전히 아내가 내게 준 선물이다. 이제부터는 대자연의 품에 조용히 안겨서 순응 일치 깨달고 사랑 감사 관조하며 살아가는 제2의 인생길을 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