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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만에 받아든 건강손상자녀 산재 승인... 그 뭉클한 기록

[알아보자 LAW동건강] 반도체 노동자 건강손상자녀 산업재해 신청 사건을 돌아보며

등록 2024.05.13 13:11수정 2024.05.13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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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아산재 관련 기자회견하는 공공운수노조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관계자 등이 2021년 6월 2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산재보상보호법 개정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2024년 3월 22일, 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한 노동자들 자녀의 건강손상이 산업재해로 인정되었다. 지난한 과정이었다. 2020년 4월 29일, 대법원은 어머니가 일터에서 유해물질에 노출되면서 건강이 손상된 자녀도 산재보험의 대상이 된다고 판단했다. 다만, 국회의 산재보험법 개정은 진척이 더뎠고, 한참 후 법이 개정됐다. 그러나 아버지 노출로 인한 태아 건강손상 배제, 시행령이 제한한 유해물질의 범위, 산재 승인시 청구 가능한 보험급여 범위와 수준 등 만족스럽지 않았다.

반올림은 법 개정 전인 2021년 5월 20일,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근무한 3인의 노동자 자녀에 대해 요양급여를 청구했다. 재해자들은 모두 여성 오퍼레이터였다. 반도체 직업병이 사회에 알려지기 전인 2000년대 이전에 근무를 시작한 것도 공통점 이었다. 

예상대로 재해조사는 오래 걸렸다. 익히 알려진 업무, 선행 역학조사 사례도 많았지만, 상병에 대한 선행 조사 사례가 없었기에 역학조사가 진행됐고, 2021년 8월 26일부터, 2023년 11월 17일까지 2년 이상의 기간이 소요됐다. 결국 2024년 1월에서야 역학조사 결과보고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역학조사의 결론은 "근로자 자녀의 상병에서 업무관련성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것으로 판단한다"였다. 그러나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역학조사 결론과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의 결론이 다른 경우가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이번 사건 역학조사보고서에 담긴 고민의 흔적 때문이었다. 반올림 활동을 함께한 입장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도 있었지만, 조금이나마 긍정적인 결론을 기대할 수 있었다. 

설 연휴 전후로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이하 질판위) 심의가 진행되리라 예상하고 긴장했다. 대리인들은 머리를 맞대고 최종의견진술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정리했다. 그러나 예상보다 질판위 심의 일정이 지연됐고, 전달받은 일정은 2024년 03월 15일. 판정 당일, 다른 사건과 비교해 판정위원회의 심의 시간이 매우 길었다. 결과는 업무관련성 인정, 산업재해로 승인됐다. 

곧바로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살펴본 판정서에는 첨단전자산업 직업병과 산재보험의 목적에 대한 위원들의 충분한 고민이 느껴졌다. 특히 역학조사에 대한 한계를 속 시원하게 지적했다. 길어진 심의 시간이 납득됐다. 평소, 질판위 판정에 대한 기대가 낮아서였을까, 아래 판정 부분을 처음 읽었을 때, 다시 옮기는 지금도 뭉클하다.

"역학조사에서는 근로자가 직접 취급한 화학물질은 없어 근로자가 높은 수준의 화학물질에 노출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되었으나, 반도체 공정의 여러 작업장에서 생식독성물질이 다수 확인되어 작업 중 이에 대한 노출을 배제할 수 없다.


기존 국내 반도체 연구에 따르면 2010년 이전의 반도체 사업장에서 근로자들이 
더 많은 유해물질에 노출되었을 것이라는 간접적인 증거를 고려할 때, 근로자가 근무하였던 1990년대에는 더 많은 유해물질에 노출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첨단산업에서 알려지지 않은 화학물질의 사용을 고려하면 근로자가 근무한 작업장의 실제 유해물질이 다소 과소평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생식독성은 표준 노출 기준에서 그동안 간과해온 질병 영역으로 태아의 노출기준 등은 설정되어 있지 않아 근로자의 노출 기준으로만 비교하여 낮은 수준으로 노출되었다고 단정 짓기 어렵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업무관련성에 대한 과학적 근거는 부족한 것으로 판단하였으나, 중대한 기형이 있는 경우 출산에 이르지 못하고 유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선천성 기형에 대한 연구 수행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사정 등을 고려할 때,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하여 업무관련성이 낮다라고 평가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지금까지 생식보건 역학연구에 초점을 맞춘 선행문헌에서 반도체 업종에 종사하
는 여성 근로자에서 유산 등의 증가는 보이나 선천성 기형에 대한 높은 관련성은 잘 보이지 않는데, 이는 선천성 기형이 있는 경우 출산 전에 유산으로 종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반도체 업종에 종사하는 여성근로자에서 자녀의 선천성 기형 위험이 증가한다는 간접적인 증거라고 볼 수 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 싸운 재해자들

3년여의 기간. 사건 진행 중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 사건을 담당하면, 재해경위서 작성과 역학조사 진행 과정에서 당사자와 수없이 연락한다. 그런데, 사건 막바지 통화때 당사자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항상 웃으며 통화하고, 반겨주던 분이기에 걱정이 앞섰다.

얼마 후, 메시지가 도착했다. "노무사님 고민해봤는데,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더 이상 이야기 할 것도 없고, 기억도 안 나고, 이젠 그만하고 싶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역학조사가 마무리되어 곧 질판위가 열린다는 소식을 전하는 연락이었기에, 사정을 설명하니 "아 그런 줄도 모르고…." 멋쩍게 웃으며, 다행히 사건은 끝까지 진행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순간 마음이 내려앉았던 그 날의 경험이 떠오른다. 

산재신청 후 결과까지 3년여의 기간만 버텨온 것은 아닐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치료받고, 회복하는 그리고 성장하는 지금까지 감내해온 고통을 감히 헤아릴 수 없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다행히 산업재해로 인정됐다. 물론 고통이 사라진 것은 아니며, 충분한 보상을 받은 것도 아니다. 다만, 일 때문에 아프게 된 것에 대한 확인이 당사자들에게, 그리고 가족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건강손상자녀 산업재해에 대한 실질적 보상

보통의 산업재해 사건의 경우, 승인 후 요양비와 휴업급여 등을 청구한다. 그러나 이 사건의 경우 지금 당장 할 게 없다. 현행법상 건강손상자녀의 산업재해가 인정되더라도, 보험급여는 요양급여, 장해급여, 간병급여, 장례비, 직업재활급여만 적용되기 때문이다(참고로 장해급여는 18세 이후 장해등급 판정을 통해 지급여부를 결정한다).

개인적으로 실효적인 보상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가령, 우리 집에도 3살이 된 아이가 있다. 건강하게 자라고 있지만, 간혹 아플 때 부모는 모든 일을 제쳐두고 아이를 돌볼 수밖에 없다. 하물며 산업재해로 인해 오랜 시간 아픈 아이를 돌보면서, 현실적인 경제활동은 쉽지 않을 것이다.

산업재해로 인한 자녀를 돌봄에 있어 휴업급여와 비슷한 성격의 보험급여를 신설하는 것은 어떨까? 돌봄을 위한 부모의 휴업이 지금보다 폭넓게 가능토록 고민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아이가 산업재해로 인해 아플 때, 기존 법을 획일적으로 적용하거나 끼워 맞추지 않고, 진정으로 어떤 도움이 필요할지 고민하는 것이 사회적 안전망으로서 산재보험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이성민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이자 노무사입니다. 이 글은 한노보연 월간지 일터 5월호에도 실립니다.
#산업재해 #생식독성 #반도체 #산재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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