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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신라면과 진라면 골라 먹고 싶다

지역에서 사라지는 점빵, '식품 사막화' 심각...농어촌 주민들에겐 개발사업보다 이동슈퍼 필요

등록 2024.06.21 06:47수정 2024.06.21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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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당신이 사는 곳 반경 15㎞ 이내에 편의점과 마트를 다 없애겠습니다. 거기에 더해 당신은 운전을 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자동차도 없애 드리겠습니다. 하나 더, 당신은 자유로운 보행이 힘든 80대 노인의 체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 당신은 누군가 공수해다 주는 음식과 식재료, 생필품을 받아서 쓰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세세하게 선택할 수 없습니다. 선택은 대분류만 가능합니다. 부라보콘을 먹을 것인지 빵빠레를 먹을 것인지, 신라면을 먹을 것인지 진라면을 먹을 것인지는 선택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어쩌다 생기는 대로, 사회복지협의회나 이해심 많은 지인과 친척이 사다 주는 대로 먹고 써야 합니다.

과장된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 농촌 마을의 주민과 어르신들이 날마다 겪고 있는 현실이다. 농촌의 인구가 줄고 고령화가 심각해지면서 그나마 마을에 하나씩 있던 '점빵'들도 사라졌다. 장사가 안되는 것도 이유겠지만 가게를 운영하던 어르신들이 돌아가시거나 기운이 떨어져 장사를 이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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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슈퍼는 1톤 트럭에 온갖 생필품과 식재료를 싣고 마을을 돌며 농촌 마을 주민들의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사진은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의 한 장면. ⓒ tvn

 
그즈음에 등장한 것이 이른바 '이동슈퍼'다. 이동슈퍼는 1톤 트럭에 온갖 생필품과 식재료를 싣고 마을을 돌며 농촌 마을 주민들의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해왔다. 이동슈퍼의 스피커에서 울리는 노랫소리나 방송을 들은 주민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이동슈퍼 차량 앞으로 옹기종기 모여든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기자의 아이들과 동네 꼬맹이들은 아이스크림을 사 먹겠다고 천 원짜리를 펄럭이며 달음박질을 치곤 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손님이 줄고 벌이가 시원찮아지자, 이 또한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명절 대목이나 김장철이 되면 반짝하고 식재료 장사들의 트럭이 산골 마을을 찾는 것이 전부다.

선거 때마다 후보자들은 언필칭 '주민의 삶의 질 향상'을 지상과제처럼 떠들어 댄다. 그런데 막상 지자체 정치인들의 관심은 거기에 있지 않은 것 같다. 온통 짓고 부수는 데만 열을 올리다 임기를 다 보낸다.

농촌에서 25년을 살아 본 결과 삶의 질 향상은 선형 개량으로 곧게 뻗은 도로와 번듯하게 지어진 행정복지센터나 공공건물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걸 확신한다. 전라북도 진안군도 거의 모든 읍면에 몇백억 원을 들여 농촌중심지 활성화 사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물로 면 소재지마다 웅장한 센터 건물이 들어섰다. 그렇다 한들 소재지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에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아마 그 건물에 한 번도 들어가 보지도 못했거나 있는 줄도 모르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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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중심지활성화사업으로 지어진 진안군 마령면 활력센터 ⓒ 진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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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중심지활성화사업으로 지어진 진안군 주천면 행복나눔센터 ⓒ 진안군

 
농촌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겠다고 도로를 넓히고 건물을 짓고 관광 개발사업을 하는 걸 말리려는 게 아니다. 다만 건축과 건설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자세는 옳지 않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 문화와 복지, 소비에서조차 소외된 이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무엇인지 정치와 행정은 살펴야 한다. 문화 활동은커녕 생필품 구매도 어려운 곳에서 살고 싶은 이가 어디 있을까?

지방소멸을 막기 위해 지방정부마다 갖가지 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농촌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문화, 복지, 경제(소비)의 만족도를 높이는 것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정책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농산어촌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일반농산어촌개발사업'만 해도 여러 갈래의 사업이 있다. 그중 하나인 농촌중심지활성화사업만 예로 들어도 어마어마한 국비와 지방비가 투입되고 있지만 농산촌의 주민이 피부로 느끼는 삶의 질 향상을 예산처럼 수치로 매겨본다면 돈값을 제대로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전북 진안군 농촌중심지활성화사업에 소요된 총사업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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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군 농촌중심지활성화사업에 들어가는 사업비 규모 ⓒ 월간광장

 
"주민들의 생활 편익, 문화‧복지시설 등을 종합적으로 확충함으로써 농어촌 주민들의 정주서비스 기능 충족과 농촌 지역의 중심 거점 공간으로 육성해 지역주민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중심거점기능을 향상하고 생활SOC시설 확충을 통해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은 물론 공동체 활성화를 위해 기초생활거점조성사업 추진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위 공직자들의 이런 바람대로 지은 공공건물 중 애초의 의도대로 100% 사용되는 곳이 단 한 곳이라도 있다면 이 기사를 내리고 큰 소리로 사죄할 것이다.

막스 베버(1864~1920 독일의 사회학자이자 경제학자)는 관료제가 만들어 내는 병폐를 설명하면서 관료조직은 조직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움직이며, 그에 속한 관료들은 자기가 속한 조직과 조직에 속한 자기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고 했다.

사업의 예산 규모를 늘려 사업을 확장하고 규모의 확대에 따라 자신들의 영향력도 커지고 직급도 올라가고 자기의 이익도 따라서 커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규모 있고 모양새 나는 사업만을 하려고 눈에 불을 켜는 것이 아닐까? 떨어지는 콩고물이 장난이 아니니 말이다.

지금 작은 규모의 지자체에 속한 공직자들이 하는 짓이 꼭 이와 같다. 주민의 실질적 이익과 편익을 증진하는 데 골몰하기보다는 어떻게든 중앙정부의 돈을 끌어와 대규모 개발사업을 벌여 조직의 이익과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만 몰두하는 것으로 보인다.

몇 명 되지도 않는 마을의 어린이와 청소년, 청년들을 위해 그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마을에 찾아와 아직 남아있는 젊은이들과 함께 과자부스러기라도 놓고 얘기는 한 번 나눠봤을까? 지금 당신들에게 제일 필요한 게 무어냐고 물어는 봤을까? 노인들에게 저 건물들이 들어서고 거기서 이러저러한 프로그램을 할 건데 참여할 거냐고 물어는 봤을까? 면 소재지, 중심지에 동아리방과 스크린골프연습장이 필요한지 지역의 청소년을 위한 쉼터와 젊은이와 귀농을 준비하는 이들을 위한 공공주택이 필요한지 물어는 봤을까?

초고령사회와 지방소멸에 대응하는 실질적 정책 내놓아야

우리나라 농촌 마을들이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식품 사막화 현상'이 점점 심화되고 있다. 2023년 농림어업조사에 따르면 농가 인구의 36.7%가 70세 이상이며, 60세 이상으로 범위를 넓히면 그 비율이 68%에 달한다. 이는 농촌 마을의 인구 절반 이상이 고령층인 초고령사회로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5년마다 실시되는 통계청 농림어업 총조사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전국의 최소 행정 단위인 행정리 3만 7563곳 중 73.5%인 2만 7609곳에는 슈퍼마켓이나 편의점과 같은 식료품 소매점이 전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면 소재지까지 나가도 식료품점을 찾을 수 없는 마을도 1만 1731곳이라고 한다. 즉, 농산어촌 지역의 마을 네 곳 중 세 곳에는 식료품 가게가 없으며, 이 중 3분의 1은 해당 면 소재지까지 나가도 식료품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렇게 간단한 식료품조차 살 수 없는 마을이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이는 인구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발생한 '식품 사막화 현상'의 대표적인 사례다. 식품 사막화 현상은 농촌 지역의 주민들이 기본적인 식료품을 구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게 하며, 이는 생활의 질 저하와 지역 소멸의 위험을 가중하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내 손으로 직접 물건을 고르는 건 결정권의 문제 

누구에겐가 의지해서 내 삶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건 괴로운 일이다. 이건 당사자들의 자존감을 저하하는 문제가 된다. 우리는 매 순간 미세한 결정을 하고 그에 따른 선택을 할 권리가 있다. 세숫비누 하나를 사도 코로 향을 맡아보고 내가 좋아하는 향을 선택하는 건 단순한 재미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결정권의 문제다.

주민의 요구를 듣고 문제의식을 느낀 마을 공동체나 지역 농협 몇 곳이 이동형 점포를 운영하면서 주민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지만 아직은 실험 수준에 머물고 있다. 다행히 얼마 전 충남도의회가 '농어촌 쇼핑 약자를 위한 이동형 슈퍼마켓 정책 연구모임'을 열어 식품 사막화 문제에 대해 제도적 고민을 시작했다고 한다.

지방정부가 절실하게 지역 소멸과 주민의 삶의 질을 걱정한다면 생활과 밀접한 서비스에 주목해야 한다. 경제성이 아닌 공공의 복지를 늘린다는 의미에서 공공 유통망을 만들어야 하고, 무엇보다 거기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을 확보해야 한다. 이동슈퍼가 되었건 약자들의 삶을 살피는 복지가 되었건 가장 필요한 건 역시 사람이다. 지자체와 농협이 머리를 맞대고 주민과 조합원의 이익을 위해 움직여 주길 바란다.

지역 농협이 트럭 한 대 내놓고, 하나로마트에 쌓여있는 물건 원가로 제공하고, 지자체가 면마다 젊은 사회복지사 한 명씩 고용해서 주민들 편의를 도모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을 아닐 것이다. 

이동슈퍼 하나로 다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만 개발사업으로 모든 책임을 다했다는 자신감을 드러내기에 앞서 조금만 더 주민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 보려는 생각을 한다면 주민들은 지금보다 훨씬 나은 삶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월간광장>에도 실렸습니다.
#이동슈퍼 #지방소멸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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