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눈이 점점 침침하고 사물이 뭉그러지게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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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명은 '망막전막'이라는 것. 시력저하는 물론 시야에 변형과 왜곡이 심해지다 방치하면 실명에 이르는 병이었다. 일단 증상이 시작된 후엔 병의 진전을 막기 위한 치료약이나 처치가 없고, 적정한 시점에 유리체 절제술이라는 수술로 전막을 걷어내는 방법이 유일하다고 했다. 수술 시기는 개인차가 있다는데, 수술이 무서운 나는 직선이 휘어보이는 '변형시'가 아직 내 일상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라는 핑계로 미루고 있는 중이다.
하여, 침침하고 사물이 뭉그러지게 보이는 왼쪽 눈 대신 요즘엔 거의 오른쪽 눈에 의지해 세상을 본다. 글자든 사람 얼굴이든 또렷하지 않으니 노상 갑갑하다.
짜증과 우울이 파도처럼 밀려와 차라리 땅바닥만 보고 걸을 때가 많다. 일찍부터 눈을 잘 돌보지 않은 점도 절절히 후회스럽다. 건조한 눈을 방치하고, 자외선에 대한 예방도 없이 안일하게 대처했던 과거 행동들 말이다. 눈에 좋다는 영양제라도 일찍 챙겨 먹을 걸.
늦었지만, 이렇게 사달이 나서야 눈을 과로하게 만드는 일들을 접었다. 글쓰기와 독서를 대폭 줄이고, 잠자리 같은 어두운 곳에서 핸드폰 영상 보기도 끊었다. 하지만 자책과 한탄은 끝도 없이 계속된다.
그러다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선글라스 끼고 지팡이로 이리저리 바닥을 훑어가며 보행하는 시각 장애인들에게 관심이 갔다. 한 눈이 잘 안 보이는 것도 이렇게 절망적인데, 도대체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일상을 살아내는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마침 중년에 시력을 거의 잃었다는 분의 기사를 접했고, 보이지 않는 깜깜한 세상에 익숙해지려 하루하루 고군분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자포자기하려는 마음을 다잡고, 가족들과 친구들의 도움을 발판으로 새 삶을 개척하고 있는 그가 남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언젠가 내게도 충분히 닥칠 수 있는 일이라 여겨졌다.
행동하고 싶었다
자연스레 나도 늦기 전에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해서든, 혹시 모를 미래의 나를 위해서든 뭐든 행동하고 싶었다. 마침 한국 장애인 재단과 알라딘이 협업으로 기획, 운영하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오디오북 녹음 프로그램이 눈에 띄었다. "소리소리 마소리 지니 서포터스"라는 명칭으로 벌써 4기째 지원자들을 선발, 운영 중이었다.
부랴부랴 정해진 대본을 녹음해 파일로 보냈고, 심사를 거쳐 정말 정말 운이 좋게도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내게 배정된 책은 박완서 작가의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란 4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에세이이다. 이 에세이는 1977년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란 제목으로 초판 출간된 박완서 님의 첫 산문집이자 대표작의 전면 개정판이라고 한다.
낯설지 않은 작가의 에세이라 반가웠기에 낭랑하게 잘 읽어내고 싶은 마음이 더욱 굴뚝같았는데, 문제는 내 목소리였다. 마이크 녹음경험이 별로 없다 보니 떨리기만 할 뿐 마음먹은 대로 표현되지 않아 걱정되었다. 다행히 장애인 재단에서는 나 같은 참여자를 위해 낭독 교육을 2회 차 준비해 주었고, 현직 아나운서와 라디오 PD를 섭외해 강의를 진행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