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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지배층... 나라는 위기로 치닫고

[김삼웅의 인물열전 - 면암 최익현 평전 10] 화해의 역할을 해냄으로써 위기를 수습해

등록 2024.07.16 18:22수정 2024.07.16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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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대한제국 고종 황제

대한제국 고종 황제 ⓒ 위키미디어 공용

 
고종은 비전이나 철학이 없는 군주였다. 국량도 작고 리더쉽도 모자라 번혁기 군주로서는 여러 면에서 결격된 인물이다. 면암이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 조정은 민씨 척족의 부패가 극심한 가운데, 1882년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정부가 신식군대인 별기군만 우대하고 구식군인들에게는 13개월 동안이나 급료를 주지 않는 등 차별이 심해서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군인들은 별기군의 일본인 교관 오리모토 레이즈를 죽이고 일본공사관을 습격한 데 이어 민황후를 처단하고자 찾아다녔으나 궁녀로 변장하고 도주했다. 위기에 몰린 고종은 대원군에게 사태수습을 맡기고 청국에 군사를 파견해 난을 진압해달라고 요청했다. 

청국군 3천명이 들어와 대원군을 텐진으로 압송하고 궁궐을 수비하던 조선군인들을 몰아내면서 조선의 내정에 간섭했다. 한편 임오군란 때 일본으로 도주했던 일본공사 하사부시가 군함을 몰고 제물포에 상륙하여 조선정부에 임오군란 주동자의 처벌과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했다. 

조선정부는 일본과 이번에도 불평등한 제물포조약을 맺고 거액의 보상금을 지불했으며, 일본에 수신사를 보내 사과하였다. 무능한 위정자와 탐욕에 빠진 민씨 칙족에 의해 나라의 사정이 날로 위급해졌다. 

1884년 10월 김옥균 등 개화파가 중심이 되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청국에 대한 종속관계 청산, 문벌폐지, 능력에 따른 인재등용, 탐관오리 처벌 등 14개조 정강을 발표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민 황후가 불러들인 청국군에 의해 '3일천하'로 끝나고 김옥균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홍영식 등 남아 있던 참가자들은 청국군에 살해되었다. 

일본과 청국은 1885년 4월 중국 톈진에서 조선에서 청·일 두 나라 군대가 철수한다는 톈진조약을 체결하고 향후 청·일 중 한쪽이 조선에 파병할 경우 그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린다고 규정했다. 이에 따라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할 때 청국군이 파병하자 이를 빌미로 일본군이 들어와 동학농민군을 학살하고 조선점령의 발판으로 삼았다. 

무능한 고종 정부는 외세가 조선을 먹잇감 삼아 저들 입맛대로 회를 쳐도 이같은 사실에 눈을 감은 채 권력유지에만 급급하고 있었다. 면암은 해배되자 귀향길에 다시 장성의 노사 기정진을 찾아 뵈었다. 그는 80세의 노령으로 병중에 있었으며 얼마 후 타계하였다. 


면암은 1879년 봄 3년만에 고향 포천으로 돌아와서 연로하신 부친을 모시고 모처럼 한적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1년여가 지난 1880년 봄 갑자기 조정에서 호군(護軍)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증조부 2대가 추영(追榮)되고 아버지가 승자(陞資)하는 은명이 내렸다. 

조정에서 이같이 우대한 것은 면암의 강직한 선비정신과 그를 존숭하는 각지의 선비들이 많아서, 그리고 어려웠던 시기에 그의 용기 있는 상소로 인해 자신이 왕권을 회복했음에도 두 차례나 유배를 보낸 데 대한 인간적 미안한 감정이 아니었을까 사료된다. 


아버지가 1887년 5월 작고하셨다. 1889년 8월 탈상 때까지 일체의 활동을 중단하고 여막 살이를 하였다. 이것은 당시 유생들의 관습이었다. 

그의 흑산도 유배와 부친상 등 신변사는 어떤 측면에서 그가 격동기에 살아남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황준헌이 일본에 갔다가 들여온 <조선책략>을 둘러싸고 벌어진 사태,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 변란이 일어났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의 사상적 모태인 화서학파의 분란에는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화서문하의 동문들 사이에 벌어지는 두 가지 갈등을 조정하는데 노력하였다. 하나는 유기일(柳基一)의 과격한 행동으로 구암과 성재의 견책을 받자 동문의 화합을 위해 유기일을 포용하도록 주선하였던 것이요, 다른 하나는 스승 화서의 심설에 이견을 밝혀 <서시동문제공(書市同門諸公)>을 지어 제시하자, 먼저 중암이 이를 비판하고 중암과 성재를 각각 종유하는 인물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을 때, 면암은 중암과 함께 사설(師說)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성재에 대해 사설에 어긋남을 견책하였다. (주석 1)

화서학파의 동문 선배 중암 김평묵은 화서의 적통을 승계한 면암의 정신적 후견인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양근 대곡(현 홍천군 서면 대곡리)을 찾아 위안을 받았다. 

중암은 면암이 흑산도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오자 격려하는 시문을 보내왔다. 

 탄핵하는 말들이 옛날에 분분했는데
 네 해의 귀양살이는 성은이었네
 또 다시 세자로 인한 은전이 미쳐
 먼 정객을 전원으로 돌아오게 했도다
 설성을 돌아봐도 지기 없는데 
 벽리의 전한 심법 아언에 있네
 동산에서 조용히 사는 것 해롭지 않으니
 서감과 선실도 뜬구름일세. (주석 2)
  
화서의 또 다른 제자 성재 유중교가 1886년 겨울 동문들에게 <서시동문 제공>이라는 글을 보내 화서의 심설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로서 "중암과 성재 사이에 심각한 알력이 노정되고 논쟁이 계속되는 등 이미 양 문인들 간에는 심설 논쟁의 시비를 둘러싸고 격렬한 문구의 서신왕래가 수차 계속되었다." (주석 3)

이에 면암은 1888년 4월 성재에게 편지를 보내어 선사의 학설을 함부로 수정한 잘못을 지적하였다. 

면암은 스승의 제자들의 논쟁이 차츰 감정대립으로 악화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양측의 견해 차이를 조정하고 화해의 역할을 해냄으로써 위기를 수습하였다.


주석
1> 금강태, 앞의 책, 215쪽.
2> 박민영, 앞의 책, 81~82쪽.
3> 앞의 책, 92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면암 최익현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최익현평전 #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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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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