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랑 여행 가서 찍은 사진.
황은비비
엄마, 안녕. 나는 엄마랑 함께하는 모든 걸 좋아해. 지난 가을에 함께 책방에 가자고 이야기한 것도 언제든 엄마와 밖에서 데이트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었어.
어렸을 때 말이야, 짝꿍이 새로 산 필통과 캐릭터 샤프, 지우개를 자랑하는 걸 들으면서 가장 부러웠던 말이 하나 있었어. "이거 우리 엄마가 골라준 거야." 엄마가 유독 바쁘거나, 우리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적은 것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그 말이 제일 부럽고 기억에 남더라고. 그냥 나는 '엄마랑' 한다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기질을 타고난 아이였던 것 같아.
책방에서 책을 같이 읽으려면 우선 같이 집을 나서고 같이 지하철을 타야 했지. 그날따라 지하철역까지 가는 길이 어찌나 멀던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가는 길목에 있는 공원에서는 축제를 하고 있었고 엄마가 그곳을 지나칠 리가. 엄마를 데리고 가니까 나 혼자 가는 것보다 몇 십분은 더 걸렸던 것 같아. 그래도 좋았어. 엄마가 그토록 활기찬 사람이었는지, 풍부한 표정을 가진 사람이었는지 알게 되었거든.
어차피 같은 곳으로 가야 하니까 그걸 기다리는 일도 참을 수 있었어. 한편으론 기다린다는 말이 좀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하더라. 내가 나한테 기다린다는 말을 쓰지는 않잖아. 그러니까, 엄마와 함께 있으면 나와 완전히 다른 타인을 나라고 느끼는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 같아.
그 기분이 싫지 않아서 엄마와 함께하는 일이 좋아. 좋아하는 장소도, 취미도 모두 다른데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잘 지낼 수 있을까. 80%는 나의 섬김과 봉사 덕분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해.
9920%는 엄마의 사랑과 기도 덕분이 아닐까. 내가 시험에 떨어지고 한창 우울했을 때 있잖아, 밤만 되면 침대 위에서 그냥 주륵주륵 눈물을 흘리던 때. 그날도 코에서는 축축한 냄새가 나고 마음은 점점 새까매져서 이미 잠든 엄마의 고른 숨소리조차 원망스러운 날이었는데, 그 원망이 날 더 진창으로 끌어들이려던 순간 엄마가 해 준 말이 불쑥 떠오른 거야.
"옛날에. 너 대학 발표날. 다 떨어지고 추가 합격 기다려야 한다고 하는데... 밤에 돌아누운 네 등이 너무 안쓰러워 보이는 거야. 그때 생각했어. 네가 뭘 하든, 아니 뭘 하지 않더라도 그냥 너 자체로 엄만 널 응원해야겠다고. 이 시험도 똑같아. 엄만 그냥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난 엄마랑 걸어다닐 때 행복하거든. 그냥 함께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감사하거든. 아, 그럼 나는 이미 꽤 괜찮은 삶을 살아내고 있구나. 그저 살아내는 것도 아름다운 삶일 수 있구나 싶었어.
사실 올해 시험에 합격할 거라고 생각했다? 일필휘지로 정말 잘 쓰고 나와서! 합격해서 엄마 호강시켜주고 인생의 동반자 LG 트윈스는 우승하고, 최고의 해를 보내고 싶었어. 근데 그게 망해버렸지 뭐야. 늪으로 쑤욱, 빠져버리는 건 순간이었어.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다른 곳으로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조급하다. 고 생각했었는데. 왠지 다시 용기가 솟았어. 엄마가 있음으로, 내가 그 말을 기억하고 있음으로, 단지 그걸로.
출근길 계단을 오르내릴 때 앞사람의 신발이 보여. 왼쪽 밑창만 닳은 신발, 안쪽 밑창이 닳은 신발, 뒤꿈치 부분이 심하게 구겨진 신발. 신발만 보고도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의 걸음걸이와 습관을 알 것 같더라고. 신기하지, 신발이 담고 있는 게. 그 사람이 어디에 다녀 왔는지, 어떤 화려한 곳에서 어떤 비싼 음식을 먹었는지는 남아있지 않고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해 움직인 시간만이 담겨 있을 뿐인데.
시험을 통과해서 합격의 문을 활짝 열고 꿈꾸던 세계에 도착했다면 좋았겠지. 그렇지만 이젠 더이상 그 결과에 집착하지 않아. 그곳에 도착했건 도착하지 않았건 내 삶에는 그 길을 걷던 습관과 태도가 남아 있을 테니까. 큰 명성을 얻지 못해도,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지 못해도 기죽지 않으려고 해. 아, 물론 얻을 기회가 찾아온다면 야무지게 낚아챌 거야. 그렇지만, 그러하지 않더라도. 고스란히 흔적처럼 남을 것에 더 신경 쓰며 살게. 엄마의 말이, 엄마의 존재가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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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사랑이 이긴다고 믿는 낭만파 현실주의자입니다. 반건조 복숭아처럼 단단하면서도 말랑한 구석이 있는 반전있는 삶을 좋아합니다. 우리 모두는 언제나 모순적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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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리와 엄마가 한 거, 저도 한번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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