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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휴일 아닌 제헌절, 음험한 의도 있다

[주장] 제헌절 공휴일 재지정이 필요한 이유

등록 2024.07.17 09:49수정 2024.07.17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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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관에 설치된 제22대 국회 개원 현수막이 7일 오후 제76주년 제헌절을 알리는 현수막으로 교체되고 있다. 2024.7.7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관에 설치된 제22대 국회 개원 현수막이 7일 오후 제76주년 제헌절을 알리는 현수막으로 교체되고 있다. 2024.7.7 ⓒ 연합뉴스

 
오늘은 76주년 제헌절이다. 일제의 질곡에서 해방된 지 3년 뒤인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되었다. 명실공히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한 대한민국의 국가 체제가 완비된 날이다. 이 제헌 헌법을 근간으로 하여 한 달 뒤인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제헌절은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지정한 5대 국경일 중 하나다. 국경일이란 여느 기념일과는 달리, 국가적으로 경축할 날이라는 뜻이다. 참고로, 5대 국경일이란, 날짜 순서대로 3.1절과 제헌절, 8월 15일 광복절, 10월 3일 개천절, 10월 9일 한글날 이렇게 다섯 날이다.

그런데, 명색이 고등학생들인데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친구들이 태반이다. 질문에 곧장 대답하는 경우는 한 손에 꼽을 정도고, 심지어 제헌절이 무슨 날이냐고 두리번거리는 아이도 적지 않다.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5대 국경일을 함께 거론했더니, 유독 제헌절만 낯설어했다.

아이들이 말하는 제헌절이 찬밥 신세인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다른 네 국경일은 모두 공휴일인데, 제헌절만은 쉬지 않아서라고 이구동성 답했다. 쉬는 날이면 왜 쉬는지 자연스럽게 자문해 보게 되지만, 쉬지 않으면 국경일이든 뭐든 주중의 평일과 하등 다를 바 없다는 거다.

국가 체제 완비된 기념비적인 날

기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 날은 광복절과 제헌절이었다. 제헌절이 정부 수립 이듬해인 1949년부터 공휴일로 지정된 이유다. 그로부터 줄곧 여느 국경일처럼 번듯한 공휴일이었다가, 2008년부터 법적으로 공휴일에서 제외되는 수모를 당했다.

이유는 공휴일이 많아 기업의 생산성이 저하되고 임금 부담이 커진다는 것이었고, 제헌절이 맨 먼저 그 유탄에 맞았다. 쉬는 날이 많아 기업 경영에 지장이 많다는 논리는 예나 지금이나 전가의 보도다. 허구한 날 놀 생각만 하니 경제 발전이 되겠느냐는 단순하고도 부박한 여론과 주야장천 '비즈니스 프렌들리'만 외쳐댄 이명박 정부의 결정이었다.


이는 제헌절만 겪은 문제도 아니었다. 또 다른 국경일인 한글날도 1991년에 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가 한글학회 등 문화 관련 시민단체들의 줄기찬 노력 끝에 2013년에 비로소 공휴일로 재지정되었다. 한글날이 공휴일에서 제외된 이유 역시 쉬는 날이 많아 우리 경제를 발목 잡는다는 것이었다.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를 경험하고도 고유의 글과 말을 지켜낸 나라가 극히 드문데, 한글날을 경시한 건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외국인들조차 대한민국 역사를 상찬하며, 민주화와 경제 성장을 동시에 이뤄냈다는 점과 함께 고유의 언어를 지켜냈다는 사실을 근거로 댄다. 정작 세계에서 한글을 경시하는 사람은 한국인들뿐이라고 조롱할 정도다.


한글날이 공휴일로 재지정되면서, 세계적으로도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문자로 평가받는 한글의 우수성을 새삼 깨닫는 기회가 됐다. 정부의 공식 기념식 외에도 다양한 행사가 열리면서 한글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우리 민족과 국가에 대한 국민 개개인의 자긍심이 올라가는 건 차라리 덤이다.

이는 제헌절을 공휴일로 재지정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느덧 아이들의 기억 속에서조차 지워진 제헌절의 의미를 되찾아와야 한다. 그것은 하루 더 일하느냐 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역사, 나아가 국가적 정통성과 결부된 사안이기 때문이다. 거듭 강조하건대, 제헌절은 국가 체제가 완비된 기념비적 날이다.

다사다난했던 대한민국의 역사는 곧 헌법 개정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으로 대표되는 불의한 권력은 무도하고 불법적인 헌법 개정을 통해 독재 권력을 유지해 나갔다. 그들의 망나니 칼부림에 숱한 양심적 인사들이 죽임과 고문을 당했고, 장삼이사 국민의 인권은 철저히 짓밟혔다.

역사적 치욕으로 기록된, 이른바 '발췌 개헌'과 '사사오입 개헌'은 얼굴이 화끈거려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설명하는 것조차 주저된다. 희대의 악법이라는 '유신 헌법'은 또 어떤가. 그 '유신 헌법'을 기초하고 집행한 자들이 여전히 기득권을 행사하고 있는, 가치관이 물구나무선 우리의 현실을 헌법 개정의 역사는 생생히 증언한다.

유신 헌법을 통해 대통령이 된 전두환은, 유신 헌법을 개정한 뒤 이듬해 체육관 선거로 다시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같은 체육관에 모인 이들의 직함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선거인단'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당시 '7년 단임제 개헌'을 최고의 치적으로 내세우며 전두환을 '민주화의 아버지'로 호명하는 부인 이순자의 항변은 헌법 개정의 역사 속에 가장 황당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섣부르긴 해도, 엄연한 국경일인 제헌절을 공휴일에서 제외하자고 부르댄 경제인들과 정치인들의 음험한 의도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제헌 헌법의 의의를 깎아내리고 헌법 개정의 역사를 국민의 집단 기억에서 지우려는 수작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헌법 정신이 강조될수록 친일과 독재 권력에 부역한 그들의 '업보'가 까발려질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온 국민이 헌법 읽을 때 사회는 그만큼 진보

만시지탄이지만, 제헌절을 공휴일로 되찾아오는 일은 '집 나간' 대한민국 헌법의 가치를 재인식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나아가 파란만장했던 우리 현대사에 관해 공부하며 뒤틀린 가치관을 성찰하고 바루는 기점이 될 수 있다. 헌법이 국민주권을 명토 박은 민주공화국의 근간이라면, 민주공화국의 시민임을 자각하는 날로서 제헌절을 기려야 마땅하다.

이참에 공휴일 재지정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우리 함께 대한민국 헌법을 읽어보자.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는 말은 문화유산에만 적용되는 금언은 아닐 테다. A4 용지로 출력하면 고작 10장 남짓의 분량인데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강퍅한 현실부터 성찰하면 좋겠다. 온 국민이 헌법을 '교과서' 삼을 때, 우리 사회는 그만큼 진보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를 되뇌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선언적 조항인 제1장 총강과 정부 조직 등에 관한 내용인 제3장 이하의 내용은 건너뛰더라도, 적어도 제2장 국민의 권리와 의무, 제10조부터 제39조까지의 내용만큼은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

바로 거기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각자가 누려야 할 권리가 명시되어 있다. 권리에 대한 이해는 의무 이행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나아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긍심을 가슴에 심어줄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헌법과 친숙해져야 하는 이유다. 모두가 대한민국 헌법을 밑줄 그어가며 읽어야 하는 날, 오늘은 76주년 제헌절이다.
#제헌절 #대한민국헌법 #5대국경일 #한글날 #공휴일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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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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