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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재 보상 질병 인정 범위 확대, 역사와 과제

산재보험 60년, 노동자 권리 보장 체계로 ③

등록 2024.08.19 15:50수정 2024.08.19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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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0여 년 동안 산재보험으로 보상되는 질병의 범위 역시 확대되어왔다. 처음 산재보험이 시작될 때는, 주로 업무상 사고에 따른 치료와 요양만이 보상 대상이었다. 사고가 아닌 질병은 1980년대까지도 진폐증이 대부분이었다. 진폐증과 화학물질에 의한 급성 중독 등 단일한 직업적 원인 때문에 발생하는 '직업병'에서 업무 요인이 업무 외 요인과 함께 작용하여 질병을 일으키는 '업무관련성 질병'으로 산재 보상의 무게 중심이 이동하게 되는 데에는 산업 구조의 변화도 중요한 배경이 되었지만, 노동자들의 투쟁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직업병에서 업무관련성 질병으로

지금 산재보험으로 보상되는 업무상 질병의 대부분(승인 건의 약 70%)을 차지하는 근골격계질환은 1990년대 후반에야 본격적으로 산재 보상 대상이 되었다. 이미 1987년에 방송국 타이피스트들이 경견완 증후군을 직업병으로 인정받았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확대되지는 못했다. 집단적인 직업병 투쟁을 처음 시작한 것은 1995년 한국통신 114 번호안내원들이었다.

노동조합이 구로의원과 조사를 벌여 500여 명의 환자를 찾고, 이 중 1/3은 산재요양 신청을 했다. 이런 상황에도 산재 신청을 방해하며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던 회사를 국정감사에까지 끌고 간 이후 회사로부터 환경 개선을 약속 받고, 1995~1996년에 거쳐 265명이 산재를 인정받았다1).

이후 2003년을 정점으로 진행된 금속제조업 노동자들의 집단 산재 요양 신청 투쟁은 제조업 전반으로 투쟁을 확장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IMF-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이후 높아진 노동강도와 근골격계질환의 연관성을 짚으며 집단적 노동조건 개선을 내걸고 투쟁한 것, 노동안전보건운동이 '산재 추방' 과제를 넘어 현장 조직화 과제와 만난 것도 중요한 성과다.

2003년의 집단요양신청 투쟁 사례를 몇 가지만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5월 삼호중공업 지회에서 89명이 집단요양 신청해서 2명 제외 87명 승인, 현대자동차 지부에서 169명 신청, 4명 제외 165명 승인, 2~7월 사이 두원정공노조에서 100명 신청해서 전원 승인이 대표적이다.

이런 대량의 산재요양 신청과 승인은 산재보험 제도의 역사에서도 큰 변곡점이었다. 근로복지공단은 집단 산재요양 신청을 방해하거나, 승인율을 조절하거나, 요양 기간을 줄이는 등의 다양한 대응을 때때로 시도했지만, 근골격계질환이 중요한 직업성 질환이라는 사회적 인식 확대를 막을 수는 없었다.


a  산재보험이 보상하는 업무상질병 범위는 넓어져 왔지만, 이제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2024년 6월 25일 열린 산재보험 60주년 노동안전보건운동단체 기자회견.

산재보험이 보상하는 업무상질병 범위는 넓어져 왔지만, 이제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2024년 6월 25일 열린 산재보험 60주년 노동안전보건운동단체 기자회견. ⓒ 산재보험 개악 대응 함께


반올림과 직업성 암 찾기 운동으로 보상 영역으로 들어온 직업성 암

직업성 암은 여전히 매우 적은 숫자만 산재로 인정되고 있다. 2020년 이후에야 1년에 승인되는 건수가 300건을 넘었다. 학계에서는 전체 암 중 5% 정도를 직업성 암이라고 추정하며, 한국에선 매년 약 30만 건의 암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직업성 암은 매년 1만 건이 넘을 것이고, 이 중 겨우 300건만이 산재로 보상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나마 한국에서 이 정도라도 직업성 암에 대한 인식이 확대된 것에는 반올림의 역할이 크다. 2007년 고 황유미씨의 백혈병이 직업성 암일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반올림 활동이 시작되었고, 7년간의 싸움 끝에 2014년 8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산업재해로 인정받았다. 이 과정에서 반도체 산업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에게서 발생한 다수의 암과 희소 질병이 드러나게 되었고, 2015년 이후 반도체 산업 노동자의 유방암, 난소암, 폐암 등이 산재로 승인되었다.

2010년대 초반 금속노조에서도 직업성 암 찾기 운동이 벌어지고, 10년 이상 용접한 조선소 노동자의 폐암, 포스코 등 제철소 코크스 공정에서 일했던 노동자의 혈액암, 자동차나 조선업 등 다수 사업장 도장작업 노동자의 혈액암 등이 직업병으로 인정되게 되었다. 일부 발암 물질이 포함된 세척제나 페인트가 작업장에서 사라지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최근 직업성 암에서 가장 뜨거운 사례는 학교급식노동자들의 폐암이다. 인체 발암 추정 물질인 조리흄 노출 외에 폐암 발생 위험 요인이 거의 없는 다수의 조리 노동자들에서 폐암이 발생하였고, 2021년 첫 번째 산재 승인 사례 이후 지금까지 100명이 넘게 산재로 승인되었다. 단체급식 현장의 환기 시설 개선이나 인력 확충 등 예방 활동으로도 연계되고 있어 고무적이다.

다양한 업무상 질병의 등장

60년 산재보험 역사에서 뇌심혈관질환과 과로사가 차지하는 역사도 길지 않다. 1991년 대법원은 업무상 이유로 고객과 잦은 술자리를 해야 했던 노동자의 과로사를 인정했는데, 이것이 국내 첫 번째 과로사 사례다. 산재보험의 직업병 목록에 추가된 1995년 이후 뇌심혈관질환 산재 승인 사례는 상당히 늘어났다. 2023년 기준 뇌심혈관질환으로 산재보상을 받은 노동자는 899명, 이 중 사망자는 364명이다.

정신질환이 산재로 인정받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2022년 기준 산재로 승인된 정신질환 393건, 이 중 사망자는 50명이다. 근로기준법에 직장내괴롭힘 방지 규정이 들어가거나 산업안전보건법에 감정노동자 보호 규정이 도입된 데에는 이로 인한 정신 건강 피해를 산재로 제기하고 업무관련성을 인정받으면서 문제를 드러내 온 투쟁이 있었다.

가장 최근의 큰 변화로는 "임신 중인 노동자가 업무수행 과정에서 유해인자에 노출되어 출산한 자녀에게 부상, 질병 또는 장해가 발생하거나 그 자녀가 사망한 경우 업무상의 재해로 본다"는 규정이 산재법에 포함된 게 있다. 이렇게 산재 보상 대상이 되는 질병의 범위는 넓어져 왔다. 업무관련성이 새로 과학적으로 밝혀진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피해를 드러내고 투쟁하는 노동자들 덕에, 어느 정도의 업무관련성이 있는 경우까지 보상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변하면서 넓어진 측면이 더 강하다.

길어지는 대기기간, 어려워지는 판단

하지만 지금 한국 산재 보상 체계가 부닥친 문제는 단순히 '산재로 보상하는 업무상 질병의 범위를 넓혀라'고 주장하기만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먼저 업무상 질병 판정 과정에 시간이 너무 많이 든다. 2023년 기준 근로복지공단의 전체 질병 처리 건수는 3만1666건, 질병판정위원회 판정 건수는 1만8523건이었다. 진폐증과 소음성 난청은 질병판정위원회를 거치지 않기 때문이다. 특별진찰과 역학조사를 상당히 줄이더라도, 대부분 질병을 질병판정위원회에서 판단하는 구조 자체가 업무상질병 여부 판단에 긴 시간이 들게 만든다.

2023년 기준, 신청부터 판정까지 질병판정 소요 기간은 평균 214.5일이다. 뇌심혈관질환이 122일, 근골격계질환은 146일로 짧은 편인데, 이 경우도 산재 신청을 하면 결과가 나올 때까지 평균 4~5달은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다. 심각한 처리 지연 문제가 빠른 치료와 복귀라는 산재보험의 목적 자체를 위협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추정의 원칙이 도입되었다. 2018년에 도입된 추정의 원칙은 뇌심혈관계질병, 근골격계질병, 직업성 암, 정신질병 등에서 노출 기간, 노출량 등의 기준을 만족하면 반증이 없는 한 산재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질병 산재 신청 절차 중 현장조사/역학조사를 생략하여 신속하게 판정이 이루어지도록 한 것이지만, 추정의 원칙 적용 범위가 지나치게 좁고, 추정의 원칙에 해당하더라도 질병판정위원회를 모두 거쳐야 한다는 점에서 신속성 확보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2023년 기준 1만여 건에 달하는 근골격계 질병 중 추정의 원칙 적용된 경우는 610건으로 4.2%에 불과했다.

업무관련성 질병 판단 단순화와 상병수당

앞으로 더 많은 질병이 업무상 질병으로 신청된다고 가정할 때, 지금의 체계는 이를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이 아니다. 추정의 원칙에 해당하는 질병과 직업력 범위를 훨씬 넓히고, 여기 해당되는 경우 다른 조건 없이 바로 인정해야 한다.

유럽 국가 대부분에서 직업성 암의 인정에는 등재제도(list system)를 사용한다. 노출 시 직업성 암을 유발할 수 있는 물질의 목록과 최소 노출기간 등을 등재해 두고, 이를 만족할 경우 다른 조건 없이 직업성 암으로 인정하는 제도이다. 아직 등재되지 않은 물질로 인한 직업성 암을 놓치지 않기 위해 비등재제도를 보완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2).

예를 들어 현재 뇌심혈관질환의 업무관련성 인정 기준으로 활용되는 고용노동부 고시 기준에 해당되면 근로복지공단 지사에서 바로 산재로 인정할 수 있다. 질병판정위원회나 특별진찰을 거치지 않고 행정적으로 처리하는 건수를 훨씬 늘려야 한다.

개별 사건마다 업무관련성을 따로 평가하기보다, 질병이나 사고로 생계가 중단된 '일하는 사람'에게는 고용과 소득을 무조건 보장해주고, 업무관련성 평가는 전략적으로 예방과 연계되도록 집단적/국가적 차원에서 진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산재보험의 제도적 한계를 상병수당이나 유급병가와 함께 풀어 나가야 하는 이유다.

이런 접근이 회사에 면죄부를 주는 데 그치지 않도록 유급 병가를 충분히 보장하거나 상병수당에서 기업의 부담을 높이는 방안을 함께 고려할 수 있다. 업무상 질병의 원인을 밝히는 연구가 침체되지 않도록, 이 업무관련성질병 등재 목록을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하는 보완책을 둔다. 조금씩 고치는 것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한계에 도달했다. 큰 폭의 도약이 필요하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최민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입니다. 이 글은 한노보연 월간 일터 2024. 8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산업재해 #산재보험 #업무상재해 #근로복지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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