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우당현재 녹우당이라고 부르는 건물은 ㅁ자 형태로 되어 있으며 기자가 서 있는 곳은 사진에 안들어 가므로 사진 상으로는 ㄷ자다. 사진상으로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을 녹우당(사랑채)이라고 부르며 원래는 수원에 있던 건물을 윤선도 선생이 이곳으로 이축한 것이다. 정면 옆 좌우 건물은 살림집인 안채다.
이윤옥
녹우당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은 집이다. 또한 그렇게 크지도 않다. 적어도 기자의 눈에는 그러하다. 이 집은 효종임금의 사부였던 윤선도에게 효종임금이 내려준 집으로 경기도 수원에 있던 집을 1668년(현종 9)에 이곳에 옮긴 것이다. 큰 규모의 집은 아니지만, 그 당시 기와집 한 채를 경기 수원에서 전남 해남까지 옮겨오기까지 얼마나 큰 공력이 들었을까 싶다.
녹우당 툇마루에 앉아서 푸른 하늘을 올려다본다. 바람 한 줄기가 뺨을 스친다. 여름 내내 시달렸던 무더위가 언제였나 싶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무더위도 속절없이 가을에 내어주고 있는 지금, 나는 이 집에 살던 사람의 인품과 향기를 반추해 본다.
사람들은 고산 윤선도 선생이라고 하면 그의 대표적인 시가 국문학적으로 이러쿵저러쿵 얘기를 하지만, 나는 고산 선생이라고 하면 '삼개옥문적선지가(三開獄門積善之家)'라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
녹우당 종택에서 지금도 후손들이 집안의 제일 덕목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 바로 '삼개옥문적선지가(三開獄門積善之家)' 정신이다. 이는 입향조인 어초은 윤효정(漁樵隱 尹孝貞, 1476~1543) 공이 어려운 지경에 빠진 백성을 3번이나 구제해 주어 '삼개옥문적선지가'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어초은 공은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세금을 내지 못하여 옥에 갇히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세금을 대신 내주고 이들을 풀어주었는데 이렇게 하기를 3번이나 하였다는 것이다.
어초은 공은 당시의 산림학자들이 명리의 그늘에서 벗어나 산촌의 삶 속에서 성리학의 실천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듯이 자신도 산림에 살며 '고기잡고 땔나무 하는 숨겨진 사람'을 뜻의 어초은(漁樵隱)이라는 호를 지어 평생 이웃을 돌보는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았다.
'어떤 상황이든지 화는 늦게 내는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