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을수록 몸과 마음이 느려지는 넉넉한 길

지리산 둘레길 5코스 동강-수철 구간 걷기 탐방에 다녀오다

등록 2024.09.09 11:20수정 2024.09.09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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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지리산 둘레길 5코스 시점, 함양 동강 마을

지리산 둘레길 5코스 시점, 함양 동강 마을 ⓒ 이완우


지리산 북쪽 함양 휴천면 동강 마을 들녘의 길섶에는 코스모스가 피기 시작하는 9월 초순의 계절이었다. 이 마을 앞을 흐르는 엄천강은 맑고 힘찬 물살에 수달이 헤엄치는 장면을 만날 수 있는 청정 자연이다.

지리산 둘레길 5코스는 함양 휴천면 동강 마을에서 출발하여 산청군 금서면 수철 마을까지 12.2km의 구간이다. 이 길은 엄천강을 따라가다가, 왕산(王山, 923m)으로 이어지는 지리산의 줄기를 넘어서 수철 마을로 이어진다. 동강 마을에서 엄천강 자혜교를 지나 방곡 마을의 산청함양추모공원까지 2.7km, 상사폭포를 지나서 지리산 주능선에서 왕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넘는 쌍재에서 산불 감시초소(전망대)까지 4.5km, 내리막길로 고동재를 거쳐 수철 마을까지 임도를 따라 5.0km의 경로이다.


지리산 둘레길을 걸을수록 몸과 마음이 점차 느려진다. 넉넉한 지리산의 품격을 느끼고 걸음 속에 성찰이 깃들기 때문이다. 둘레길의 풍경과 마을에 가깝게 다가가고,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만난다.

동강 마을에서 이른 아침의 햇살을 받으며 지리산 둘레길 5코스의 여정을 출발하였다. 강 건너 엄천사터 북쪽에는 김종직이 조성한 차밭이 있었다고 한다. 함양에는 차(茶)가 전혀 나지 않았는데, 조정에서는 차를 공납하라고 했다. 이에 함양 군수였던 김종직(1431~1492)이 함양 백성들을 위해 차밭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산청 방곡(芳谷) 마을은 아름다운 산천에 꽃이 우거져서 '방실(방곡)'이라 하였고, 이 마을 위쪽의 오봉산 깊은 산중에도 온갖 꽃과 숲이 우거져 화림사(花林寺)가 있었다.

a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 ⓒ 이완우


산청함양추모공원에 도착하였다. 6.25 한국전쟁 기간 1951년 2월 초에 산청과 함양에서 국군에 의해 학살되었던 양민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묘역이다. 한국전쟁 중 민간인 학살이라는 역사의 비극이 기억되는 현장에서 마음이 숙연해진다.

둘레길은 오봉천으로 내려서고 숲길로 접어든다. 상사바위의 전설이 애틋한 상사폭포를 지난다. 왕산으로 오르는 상사골 계곡은 원시림으로 푸르렀다. 왕산은 가야 구형왕(양왕)이 여생을 보냈다는 곳이다. 쌍재 고갯길에 이르렀다. 쌍재는 함양 휴천에서 산청현으로 오가는 고갯마루였다. 옛날에 함양 마천의 특산품인 곶감을 보부상들이 지게에 짊어지고 이 쌍재를 넘어 산청으로 넘어갔다.

둘레길은 쌍재에서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서서 지리산 천왕봉(1,915m) 쪽으로 한참을 이어지다가 산불 감시초소에 머물렀다. 이곳에 세워진 지리산 천왕봉 방면 조망도를 보며 지리산의 연봉들을 헤아려본다. 푸른 하늘을 배경 삼아서 천왕봉에 구름이 피어나서 풍경화를 그려가고 있었다.


남쪽으로는, 천왕봉에서 중봉 하봉을 거쳐온 산줄기가 이곳 산불 감시초소와 쌍재를 지나 왕산에 이른다. 왕등습지, 진주독바위를 찾아보았다. 함양독바위가 멀리 희미하게 우뚝 솟아있다. 북동쪽으로는, 가야의 구형왕릉이 있는 왕산과 붓끝 형상의 필봉산(858m)이 형제처럼 솟아 있다.

a  지리산 둘레길 5코스 산불 감시초소 앞에 펼쳐진 지리산 전경

지리산 둘레길 5코스 산불 감시초소 앞에 펼쳐진 지리산 전경 ⓒ 이완우


둘레길이 상사폭포에서 이곳 산불 감시초소까지 계속 오르막이었다면, 이제부터 고동재를 지나 수철 마을까지는 내리막길이다. 동강마을에서 출발하여 7.2km의 들길과 오르막 산길의 둘레길은 세 시간 넘게 걸렸다. 이제는 수철까지 한 시간 반쯤 걸으면 되는 5km 둘레길 구간이 남았으니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점심을 먹고 잠깐 쉬었다.


고동재를 향해 가는 한결 걷기 편한 둘레길에 상수리나무 도토리가 벌써 떨어져 있었다. 아직 무더위가 한창인데 숲길은 내내 청량했다. 나무 그늘로 이어지는 숲길은 바람결도 시원하고, 풀벌레 소리가 상쾌하였다. 숲속과 숲길이 풀벌레 소리로 가득했지만 고요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둘레길은 돌계단을 내려서며 고동재에 이르렀다. 노란 나무 기둥으로 서서 지리산 둘레길을 안내하는 벅수가 검은색과 붉은색 화살 표시로 두 방향의 갈 길을 가리키는 작은 팔을 펼친 모습이 둘레길 구간에서 볼 때마다 정겹다. 갈색 기둥의 천하대장군 장승이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웃고 있다. 잘게 깬 자갈의 임도 구간에서 시멘트 포장 구간을 거쳐 아스팔트 포장 도로를 따라 내려오니 수철 마을에 도착하였다.

수철 마을은 옛날에 무쇠로 솥이나 농기구를 만들던 철점이 있어서 무쇠점 또는 수철동이라 불렸다. 경호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수철천이 마을을 가로지른다. 지리산 둘레길은 800리(300km) 구간 중에서 남원 주천에서 산청 수철까지 70여km가 제일 먼저 개통되었다.

수철 마을회관 옆에 지리산 둘레길 동강 수철, 수철 성심원 구간 시종점 표시판을 세워놓았다. 걷는 모습을 형상화하여 세워 놓은 주황색의 지리산 트레일 표시판을 보며, 오늘 하루의 지리산 둘레길 5코스의 걷기를 마무리하였다.

a  지리산 둘레길 5코스 종점, 산청 수철 마을

지리산 둘레길 5코스 종점, 산청 수철 마을 ⓒ 이완우


동강에서 수철까지 지리산 둘레길 5코스 구간의 자연환경은 엄천강과 왕산이 중심이다. 이 지역에서는 엄천강이 동북으로 흘러 왕산을 휘돌아 경호강이 되어 동남쪽으로 흘러 산청읍에 이른다. 둘레길 걷기 하루의 여정을 마치고, 왕산 기슭에 있는 구형왕릉을 찾아갔다.

구형왕(仇衡王, 재위 521~532)은 가락국(금관가야)의 10대 왕으로 나라를 신라에 양도하고, 망국의 한을 품고 지리산 왕산으로 들어와서 여생을 보냈다. 동의보감촌을 지나서 구형왕릉 가는 길 어귀에 구형왕의 사당인 덕양전이 있다. 덕양전은 240여 년 전 조선 시대부터 구형왕의 제례를 지내오는 사당이다. 구형왕릉으로 오르는 길에 김유신(595~673) 장군이 젊은 시절에 무예를 연마했다는 활터의 사대비(射臺碑) 앞에 잠시 머물렀다.

구형왕릉은 작은 계곡의 개울 두 개를 건너는 석교를 지나 산기슭 비탈에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거대한 피라미드 형태의 신비한 석릉(石陵)이다. 왕릉은 일곱(7단) 돌층계로 높이 7.15m, 하단 길이 25m 규모로 웅장하며, 돌층계 4단의 중앙에는 세로 40cm, 가로 40cm의 석문이 있다. 왕릉 앞에는 '駕洛國讓王陵(가락국양왕릉)' 비석, 석등, 문인석과 사자 석상이 있으며, 높이 1m의 돌담이 왕릉을 에둘렀다.

a  산청 왕산 구형왕릉

산청 왕산 구형왕릉 ⓒ 이완우


구형왕릉이 있는 왕산(王山)은 가락국과 유래가 깊다.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이 첫째 왕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방장산(지리산) 자락에 별궁을 짓고 거주하여 그 산을 태왕산(泰王山)이라 하였다. 이 태왕산이 현재의 왕산이라고 한다. 이 태왕산에 김수로왕의 후손인 구형왕이 망국의 한을 품고 찾아왔다. 신라의 삼국 통일 주역인 김유신은 구형왕의 증손이고,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626~681)은 구형왕의 5대 외손이다.

산청(山淸)은 옛 이름이 산음현(山陰縣)이었다. 원삼국 시대에는 변한의 가락지품천(駕洛知品川)이었다. 낙동강 상류인 경호강이 흐르는 지리산 동쪽 산청의 산천(자연)과 지명은 가야를 추억하고 있다. 고려 말 길재(吉再, 1353~1419)의 시조 회고가(懷古歌)를 읊어보았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느림과 성찰의 길인 지리산 둘레길은 마을을 잇는 길, 그 마을과 지역의 이야기와 역사를 찾는 길이기도 하다.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면 어느 구간이나 여정, 견문과 감상이 충실한 느림과 성찰의 하루가 된다.

지리산 둘레길 5코스 구간 걷기 여정의 하루가 저물어 갔다. 둘레길 각 구간을 마무리하는 도착점은 다시 시작하는 출발점이다. 마음은 벌써 둘레길 다음 구간의 걷기가 가능한 날짜를 헤아렸다. 지리산 둘레길 6코스는 수철 마을에서 경호강 강변에 자리 잡은 성심원까지 12km의 구간이다. 이 구간에서 산청의 경호강을 따라 둘레길을 걸어가면서 바라볼, 지리산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웅석봉의 산줄기가 펼치는 멋질 풍광을 기대해 본다.

a  산청 지리산 둘레길 6코스 구간에 펼쳐지는 풍광, 웅석봉

산청 지리산 둘레길 6코스 구간에 펼쳐지는 풍광, 웅석봉 ⓒ 이완우


#지리산둘레길5코스 #산청왕산 #산청구형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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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사입니다. 향토의 역사 문화 자연에서 사실을 확인하여 새롭게 인식하고 의미와 가치를 찾아서 여행의 풍경에 이야기를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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