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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밭 매다가 해방 소식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조문학의 큰별 가람 이병기평전 12] 이웃들과 해방의 감격을 나누었다

등록 2024.09.25 15:06수정 2024.09.25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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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가람 이병기 선생 동상

가람 이병기 선생 동상 ⓒ (주)CPN문화재방송국


개인이나 집단·국가를 막론하고 패도가 오래가지 못한다.

진시황의 진나라, 네로의 로마, 히틀러의 제3제국도 다르지 않았다. 욱일승천의 기세로 아시아를 휩쓸고 태평양을 뛰어넘으려던 일본제국주의도 마침내 종말이 닥쳤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왕 히로히토는 녹음된 방송을 통해 '종전조서' 즉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의도한 것인지 우연인지 이 종전선언은 8백 15자로 구성되어 여전히 그 배경을 살피게 한다.

세계 식민지 역사상 유례가 없는 혹독한 식민통치를 겪은 한민족에게 8.15는 해방이고 광복이며 독립이었다. 친일파·매국적을 제외하고 3천만 국민이 그토록 기다렸던 날이 왔다. 누구보다 이날을 기다린 분들은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들이다. 물론 가람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텄다
동포여 자리차고 일어나거라
산 넘어 바다 건너 태평양 넘어
아아, 자유의 종이 울린다.(<독립행진곡>)

아이도 뛰며 만세
어른도 뛰며 만세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까지
만세 만세
산천도 빛이 나고
초목도 빛이 나고
해까지도 새 빛이 난 듯
유난히 명량하다.(홍명희, <눈물 섞인 노래>)

a  가람 이병기 선생 생가

가람 이병기 선생 생가 ⓒ (주)CPN문화재방송국


가람은 일경의 감시하에 실의에 빠져 고향에서 콩밭을 매고 있다가 해방을 맞았다.


하루는 산모퉁이 콩밭을 매고 있노라니 밭머리로 지나가는 마을 사람이 어제 일본 천황이 항복을 선언하였다 한다. 곧이 들리지 않는 말이다. 또 한 사람이 읍내를 갔다 오더니 똑같은 말을 한다. 날이 저물어 집으로 돌아오니 세무서에 다니는 내 아우가 이리(裡里)서 나왔다. 과연 그 말이 확실한 줄 알았다. 며칠 밤은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주석 1)

가람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이웃들과 해방의 감격을 나누었다.


바로 다음 다음날인 8월 17일에는 고향 사람들의 추천으로 여산민회(礪山民會)의 부위원장을 맡아 고향의 안녕 질서와 정보 전달을 도모하는 한편 전주·군산·대전 등지의 인사들로부터 초청을 받아, '한글철자법', '과거의 우리 문화', '과거의 우리 민족혼', '삼국의 흥망과 화랑도', '이조 5백년' 등에 관한 강연 등으로 가람의 나날은 생기가 넘쳤다. (주석 2)

가람은 민족해방을 맞아 고향 사람들과 사회 혼란을 막고자 여산민회의 활동을 하고, 이웃 고을의 문화강연 요청을 받아 분주한 나날을 보내었다. 그리고 암흑기에 썼던 시조를 찾아 되새겼다.

<가람시조집>에 실었던 <계곡>이다.

맑은 시내 따라 그늘 짙은 소나무 숲
높은 가지들은 비껴드는 볕을 받어
가는 닢 은비늘처럼 어지러이 반짝인다

청기와 두어장을 법당에 이어 두고
앞뒤 비인 뜰엔 새도 날아 아니오고
홈으로 나리는 물이 저나 절을 울린다

헝키고 또 헝키어 알알이 닦인 모래
고운 옥과 같이 갈리고 갈린 바위
그래도 더럽일까봐 물이 새어 흐른다

폭포 소리 듣다 귀를 막아도 보다
돌을 베개 삼아 모래에 누어도 보고
한 손에 해를 가리고 푸른 허공 바라본다

바위 바위 우로 바위를 업고 안고
또는 넓다 좁다 이리저리 도는 골을
시름도 피로도 모르고 물을 밟아 오른다

얼마나 험하다 하리 안드면 오르는 이 길
물 소리 끊어지고 흰구름 일어나고
우럴어 보이든 봉오리 발 아래로 놓인다. (주석 3)

주석
1 > 이병기, <해방 전후기>, <가람문서>, 205쪽.
2> 앞의 책, 206쪽.
3> <가람 시조집>, 3~4쪽, 문장사, 1930.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조문학의 큰별 가람 이병기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이병기평전 #이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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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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