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람 이병기 선생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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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백련(白蓮)>은 할아버지가 구해와 심은 일, 아버지가 이를 잇지 못한 사연, 자신이 두어 뿌리를 얻어다 다시 심은 사연을 비롯, 이 꽃의 특성을 군자에 비할 만큼 깨끗하고 조촐한 것을 좋아한다고 세간의 인식과는 다름을 지적한다. <백련>의 전문이다.
백련
용화산 구름 자고 천호에 딜 오르다
백련화 곁에 두고 못가로 거니노니
이따금 서늘한 바람 향을 불어 오도다.
나는 이왕 나의 졸작인 시조집 <고토>에 실었다.
내가 고적한 용화산 기슭 진사동에서 생장하여 나이 10여에 가장 반기던 건 그 주위 산야의 대자연 풍경이었다. 이것이 가장 인상이 깊고 기억이 새롭다.
그 내력일지는 모르나 우리 할아버지께서도 그 무서운 검박한 규모와 가난한 살림이로되 집 앞 논을 반 마지기나 못을 파고 70리나 되는 노성 장골서 윤팔송 선생이 중국서 캐다 심었다는 백련 뿌리를 구하여 옮겨 심었다. 그 백련이 성히 번식하여 수년 만에 한 못으로 가득 차고 삿갓만한 잎과 백학만한 꽃이 여름 내지 가을까지 한 요대를 이루었다.
나는 그때 <고문진보>에서 주염계 선생의 애련설도 배우긴 하였으나 그 뜻을 안 건 아니고 그 삿갓만한 청청한 잎사귀 사이에 백학만한 탐스럽고도 조촐한 꽃이 피어 맑고 향긋한 향내가 코를 찌르는 그때 비록 어리었지만 감촉만은 남과 달리 하였던 것이었다. 그래서 달밤이면 그 못가로 어슬렁어슬렁 걸으며 잠자기도 잊었었다.
벌써 10년 전이다. 우리 아버지께서 그 못이 너무 메었다 하고 쌓이고 쌓인 수령을 다 처내고 백련 뿌리를 놓았더니 그 뒤 백련은 착근이 뭇 되어 없어지고 말았다. 내게 매양 귀성 하였을 때 백련이 없음을 퍽 쓸쓸하게 여겼고 선인께서도 그걸 퍽 가석하다고 말씀하시었다.
내가 6.25 그 다음 해 이 전주로 와서 한동안은 이런 염 저런 염도 없었다가 작년 봄에야 백련 있는 곳을 여러 군데로 알아보고 10여 리 가서 간신히 두어 뿌리를 얻어다 심었더니 아니 살았고, 원광대학에서 16뿌리를 얻어다 심었더니 죽었다. 올 봄엔 또 얻어다가 내가 지금 있는 양사재 수체인 시궁창에 심었더니 잎이 나다 말고 뿌리가 썩어 버렸다. 너무 실패를 하매 화가 난다.
이만한 백련 하나를 살리지 못하고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이렇게도 생각하다가 다시 뉘우쳐 백련의 성질과 그 심는 방법을 연구하여 보았다. <예문지> 물명고 <광재물보>사원 등을 상고하여 보았다. 련은 시궁창 같은 더러운 흙을 좋아한다고 말들을 하나 그저 그런 것이 아니다.
그 성질이 군자에 비할 만큼 깨끗하고 조촐한 걸 좋아함이었다. 이상 서책에 적힌 걸 종합하여 말하면,
-. 련은 얕은 물에서 생장한다.
-. 련은 수령에 뿌리를 두고 담수를 좋아한다.
-. 이식은 춘분 무렵으로부터 입추 무렵까지고 삼절 이상의 뿌리라야 한다.
하는 세 가지를 알고는 다시 수채 옆에 조그마한 웅덩이를 파고 그 썩어가는 뿌리 가운데 좀 성한 놈을 골라 두어 개 심었더니 시나브로 죽는다.
토관을 사다가 밑을 막고 진흙으로 한 자 반이나 채우고 그 위에 해감 흙을 예닐곱 치 돋우고 7월12일 원광대학에서 또 삼절 이상인 뿌리 두개를 캐다 심었더니 이내 새잎이 40~50대 솟고, 8월 20일엔 두 대 꽃순이 솟아 한 대가 먼저 피었다.
두어 해를 두고 캐다 옮기면 다 죽고 죽어 핀 시궁물에 새로 다시 심은 백련 새잎은 나오다 말고 뿌리 먼저 썩는다. 토관의 밑을 막아 질흙과 해감을 넣고 세 마디 뿌리를 캐다 다시 심은 백련 두 대의 꽃순이 솟아 벌어지는 이 아침!
이건 실패하던 끝에 얻는 기쁨. 적어도 성공의 그 기쁨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실패도 그 이유가 있으려니와 성공도 그 이유가 있다.
먼저 백련을 심어 실패한 건 깊은 물바닥이 냉한 데다 심은 것과 또는 북적북적 끓는 시궁창에 심은 까닭이고, 나중 성공한 건 그 성질과 이식방법을 알고 거기 맞게 하기 때문이었다. 이만한 일도 이렇거든 보다 더 복잡다단한 일에랴. (주석 1)
주석
1> <동아일보>, 1956년 6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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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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