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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순시 맞춰 시위를!', 발칵 뒤집혔던 청주 이야기

[정진동 평전] 1973-1974년 청주시청 청소 노동자 투쟁

등록 2024.10.30 14:28수정 2024.10.30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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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동을 아십니까. 농촌선교(1958~1971)에서 도시산업선교(1971~2004) 활동까지, 정진동은 충북 지역 민주화운동의 어른이었습니다. 정진동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가 꿈꿨던 공동체 사회,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 민중해방의 사상을 살펴봅니다.[편집자말]

청소부 회의 청주시청 청소부 투쟁 회의. 우측 둘째부터 정진동, 유재향, 최명식
청소부 회의청주시청 청소부 투쟁 회의. 우측 둘째부터 정진동, 유재향, 최명식청주도시산업선교회

"휴일이 없다고요?"

토끼 눈을 한 중년의 남성이 베테랑 청소부 유재향에게 물었다. "그러면 다른 곳은 있어요?"라고 반문하는 유재향의 얼굴에는 자조감과 궁금증의 눈빛이 얽혀 있었다.

"6일 일하면 하루는 당연히 쉴 수 있죠. 설마 퇴직금은 있겠죠?" '퇴직금'이란 말에 난생처음 들어보는 말이라는 듯 유재향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어요?" "저도 청주에서 청소부 좀 해보려고요." 유재향이 묻고 정진동이 답했다.

'저 양반이 정말 청소부를 하려는 걸까?'라는 의심이 잠시 들었다. 하지만 외모를 보았을 때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청소부를 하고 싶어 노동조건을 자세하게 묻는데 모른 채 할 수는 없는 법. 하지만 유재향은 답변하는 내내 씁쓸하기만 했다.

시청 마당에 무릎 꿇어

다른 지역은 일당이 700원이라는데, 충북 청주는 기껏 일당이 480원이고 휴일도, 퇴직금도, 수당도 없다고 말하려니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시 서울시는 일당이 720원, 대전시는 689원이었으니 말이다. 자신의 민낯을 보여주던 유재향은 처음 보는 이에게 이런저런 말을 하다가 울컥했다. 자기 신세가 초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언젠가는 시청 마당에 무릎 꿇은 일도 있었어요. 청소부 전원이 무릎 꿇고 시장님께 임금을 올려달라고까지 했어요." 울먹이며 말하는 유재향의 이야기에 정진동은 기가 막혔다.


충북 청주시 석교동 육거리시장 부근 길가에서 콜라를 마시며 정진동과 유재향의 눈시울이 붉어진 것은 1973년 6월 중순. 정진동이 영등포산업교회에서 도시산업선교 실무자 교육을 마치고 청주실내체육관 맞은편 2층에 보금자리를 차린 지 며칠 뒤였다. 창립 예배는 1973년 6월 18일에 있었다.

첫 만남 이후 정진동은 수시로 석교동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석교동이 담당 구역이었던 유재향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유재향이 청주시 청소부 임금인상에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소문을 들은 터였다. 그를 만나면서 청주시 청소부들의 구체적인 노동조건을 하나하나 알게 됐다.


1973년 당시 인구 16만5000명의 청주시를 청소하는 노동자는 170여 명이었다. 이들은 동별로 구역을 맡아 청소를 했다. 일부 청소차가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골목 구석구석을 청소했다. 인분 푸는 노동자들도 수레를 끌고 다니며 오물을 수거했다. 열악한 노동환경에 임금과 노동조건은 전국 최하위였다.

유재향과 만나면서 청원군(현재 청주시) 남일면에 사는 최명식도 만났다. 이들은 어느 순간 정진동이 진짜로 청소부에 취직하려는 것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정진동은 양심(?) 고백을 했다. "사실 나는 목사입니다." 청소부들을 도우려는 불순한(?) 의도를 유재향과 최명식이 어떻게 생각할까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뜻밖의 반응이 나왔다. "어쩐지 평범해 보이지 않더구만요. 목사님. 저희 좀 도와주세요."

'보도연맹원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

 청소부들의 임금인상 건의 기사. 충청일보 1973.8.9
청소부들의 임금인상 건의 기사. 충청일보 1973.8.9충청일보

"진정서 쓴 주동자가 누구야?" "유재향과 최명식입니다." 당장 데려오라는 청주시장 채〇환의 엄명에 비서실장의 엉덩이에 불이 났다.

"당신들 보도연맹원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
"..."
"도장 함부로 찍어서 죽은 거야."

청주시장이 23년 전의 악몽이 떠오르는 말을 했다. 즉 1950년 7월 초 청주시 내 보도연맹원들이 청주시 무덕관에 소집돼 군경에 의해 학살된 사실을 상기시킨 것이다. 당시 보도연맹원들은 영문도 모른 채 보도연맹 가입서에 도장을 찍어 죽음의 구렁텅이로 빠졌다.

사실 좌익활동을 하다 '대한민국에 충성을 서약한다'면서 가입한 것이 국민보도연맹이다. 그렇기에 1950년 당시의 보도연맹과 1973년, 노동조건 개선을 바라는 진정서에 서명한 청소노동자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런데 청주시장은 뜬금없이 청소노동자들을 보도연맹 운운한 것이다. 청주시는 한발 더 나아가 유재향과 최명식 등에게 시말서 제출을 요구했다. 8월 초의 일이다.

하지만 유재향과 최명식은 예전의 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시장에게 불려가기 한 달 전에 청주시장 앞으로 진정서를 냈었다. 시로부터 답변이 없자 정진동에게 SOS를 쳤다. 청주산업선교회에서 자신들의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노력해 달라는 진정서를 낸 것이다.

정진동은 "권리 위에서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며 청소부들이 똘똘 뭉칠 것을 주문했다. 그렇게 해서 청주시 내 12개 동의 구역 책임자들과 차도(車道) 청소 3명의 책임자를 '청주시 청소부 근로조건 대책위원회(아래 대책위)' 위원으로 선정했다. 유재향이 회장, 최명식이 부회장으로 선출됐다.

정진동은 매일 대책위 회의를 했고, 일주일에 한 번 전체 청소부 모임을 열었다. 청소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개선 과제에 대해 교육을 했다. 이 과정에서 요구 사항이 명료히 정리됐다. "일당 480원을 700원으로, 휴일제도 도입, 퇴직금을 달라"였다.

이렇게 청소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조직과 요구 사항을 만들었을 때 청주시장의 '보도연맹 운운 사건'이 터진 것이다. 또한 정운탁(당시 44세)을 작업 중에 모자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8월 5일 해고시켰다. 그는 1954년에 입사한 19년 차 왕고참이었다. 이 사건은 불난 집에 부채질한 격이 되었다.

노동자 없는 노사합의(?)

 노사협의 없는 일방적 조치 비판 기사. 교회연합신문 1974.1.13
노사협의 없는 일방적 조치 비판 기사. 교회연합신문 1974.1.13교회연합신문

청주시 청소부들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부당해고는 지역에 일파만파 파장을 일으켰다. 그해 8월 5일 동산교회에서 '선교의 밤'이 열렸다. 노동자들을 위로하고 단합을 위한 자리였다. 지역의 여론도 청소노동자들에게 우호적으로 돼 갔다.

이러한 상황에도 청주시는 강경정책을 썼다. 10월 9일 대책위 위원들이 시장실로 호출됐다. 자술서를 쓰게 했다. 시장실에 한쪽에는 청주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이 우거지 인상을 쓰고 있었다. 또한 노동자들의 요구 사항에도 '절대 불가'의 입장을 밝혔다. 청주시청 한 관계자는 "시 재정상 임금인상은 불가능하다. 퇴직금 제도도 이들이 임시고용원으로 되어 있기에 실현성이 없다. 다만 휴가제도는 검토 중"이라고 했다.

청주시의 강경 대응에 노동자들은 파업을 결정했다. 11월 13일 아침 노동자들이 시청 앞마당에 앉았다. 침묵시위였다. 요구 사항은 물어보나 마나였다.

다음날 새벽에 대책위 위원들은 시청 정문과 후문 그리고 골목을 지켰다. 청주시의 협박에 못 이겨 출근하는 동료들을 막기 위해서였다. 정오에 지도부 4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청주시의 강경 대응에 시민들의 반감 여론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YWCA, YMCA에서 동조건의서가 시청에 제출되면서 사회문제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청주산업선교위원회에서도 발 벗고 나서기 시작했다. 11월 중순 산업선교위원회 명의로 진정서가 청주시에 제출됐다. 또한 대표자들이 청주시장을 면담했다.

여론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시장은 한발 물러섰다. 임금을 480원에서 600원으로 올리고, 휴일제도는 형편에 맞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청주시와 산업선교회 위원 목사들은 청소부 문제가 해결됐다고 선언했다. 신문에도 해결됐다는 기사가 나갔다. 노동자 없는 노사합의가 이뤄진 것이다.

이에 정진동과 청소부들은 강력히 반발했다. 대책위에서는 청주시의 입장에 전면 거부를 표했다. 이때부터 정진동과 충북노회, 청주시 산업선교위원회와의 갈등이 노정됐다.

'짜장면 사준다'는 말에...

 청소부 투쟁 사례 발표. 가운데가 정진동, 좌측이 최명식
청소부 투쟁 사례 발표. 가운데가 정진동, 좌측이 최명식청주도시산업선교회

유재향과 최명식은 '괘씸죄'에 걸려 12월 5일 전격 해고됐다. 청주시장은 자신이 산업선교회 위원 목사들에게 임금인상을 약속하면 일사천리로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다. 그런데 마냥 '을(乙)'인 줄 알았던 청소부들이 반발하자 기가 막혔다.

정작 기가 막힌 것은 노동자들이었다. 정진동은 유재향과 최명식 그리고 대책위원들과 상의했다. 숱한 논의 속에 절묘한 방안이 나왔다. 사상 초유의 거리 시위를 계획한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어린이부터 노인까지의 온 가족 시위였다. 청소부 170명도 공동행동을 취하기로 했다. 오후 3시가 집결 시간이었다. 12월 20일 유재향과 최명식 가족 17명이 일찌감치 점심때 청주약국 앞에 모였다.

정진동이 청주약국 근방의 중국음식점에서 짜장면 한 그릇씩을 사주었다. 처음 맛보는 짜장면에 네 살짜리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짜장면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귀로 들어가는지 몰랐다. 두 가족이 짜장면을 먹는 사이 정진동은 밖의 동태를 살폈다.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정보과 형사들과 청주시청 공무원들이 청소노동자들에게 호통을 치며 귀가를 강요했다. 170명의 노동자가 모두 흩어지자 경찰과 공무원들은 안심을 하고 철수했다.

오후 4시 30분 유신 시대 초유의 거리 시위가 시작됐다. 맨 앞 줄에 네 4살짜리 아이와 80세 할머니가 자리했다. 해고 무효라는 손팻말을 들고 남문로 본정통(현재의 성안길)을 걸었다. "우리 아빠를 복직시켜라" "우리 아들을 복직시켜라" 구호를 외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400미터 정도 걸어 한국은행 청주지점까지 갔다. 긴급출동한 경찰에 의해 전원 연행됐다. 유치장은 목불인견이었다.

결국 다른 가족들은 그날 저녁 모두 석방됐다. 유재향, 최명식은 2일 구류처분을 받았다. 그날의 짜장면 맛을 잊지 못하는 아이들이 아빠들을 졸랐다. "아빠. 우리 언제 또 데모해요?" 웃기고 슬픈 1973년 겨울이었다.

대통령 연두순시

소위 '짜장면 시위'가 있기 하루 전인 12월 19일 대책위는 청주시장을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노동부에 고발했다. 하지만 청주시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정진동은 지역의 여론만으로는 청소노동자 문제 해결이 어렵겠다고 판단했다. 서울로 올라가 각계에 호소했다. 그 결과 1974년 1월 3일 '청주시청 청소부 근로기준법 수호위원회'가 결성됐다.

위원으로는 지학순 주교, 박청산(노사협의회 회장), 조지송, 이문영, 이창복, 김경락, 김찬국, 조지 오글, 한부만(선교사) 이었다. 1970년대 당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성직자와 학계 인사가 망라한 것이다.

이러한 강력한 우군(友軍)을 바탕으로 정진동과 대책위는 또 한 번의 깜짝 시위를 계획했다. 그해 예정됐던 박정희 대통령의 연두순시에 맞춰 기습시위를 하기로 한 것이다.

시위 예정일 며칠 전부터 정진동과 유재향, 최명식은 잠수를 탔다. 청주경찰서와 청주시청은 난리가 났다. 청주경찰서장은 청주시장에게 "당장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당신이 책임져야 하오"라고 했다.

유신 시대에 시장 자리는 '하루살이'에 불과했다. 마침내 청주시장은 백기를 들었다. 1974년 2월 9일 유재향과 최명식은 복직됐고, 청소노동자들의 요구는 3월 초 100% 받아들여졌다.
#청주시청청소부 #퇴직금 #구르마 #짜장면 #연두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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