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부 투쟁 사례 발표. 가운데가 정진동, 좌측이 최명식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유재향과 최명식은 '괘씸죄'에 걸려 12월 5일 전격 해고됐다. 청주시장은 자신이 산업선교회 위원 목사들에게 임금인상을 약속하면 일사천리로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다. 그런데 마냥 '을(乙)'인 줄 알았던 청소부들이 반발하자 기가 막혔다.
정작 기가 막힌 것은 노동자들이었다. 정진동은 유재향과 최명식 그리고 대책위원들과 상의했다. 숱한 논의 속에 절묘한 방안이 나왔다. 사상 초유의 거리 시위를 계획한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어린이부터 노인까지의 온 가족 시위였다. 청소부 170명도 공동행동을 취하기로 했다. 오후 3시가 집결 시간이었다. 12월 20일 유재향과 최명식 가족 17명이 일찌감치 점심때 청주약국 앞에 모였다.
정진동이 청주약국 근방의 중국음식점에서 짜장면 한 그릇씩을 사주었다. 처음 맛보는 짜장면에 네 살짜리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짜장면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귀로 들어가는지 몰랐다. 두 가족이 짜장면을 먹는 사이 정진동은 밖의 동태를 살폈다.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정보과 형사들과 청주시청 공무원들이 청소노동자들에게 호통을 치며 귀가를 강요했다. 170명의 노동자가 모두 흩어지자 경찰과 공무원들은 안심을 하고 철수했다.
오후 4시 30분 유신 시대 초유의 거리 시위가 시작됐다. 맨 앞 줄에 네 4살짜리 아이와 80세 할머니가 자리했다. 해고 무효라는 손팻말을 들고 남문로 본정통(현재의 성안길)을 걸었다. "우리 아빠를 복직시켜라" "우리 아들을 복직시켜라" 구호를 외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400미터 정도 걸어 한국은행 청주지점까지 갔다. 긴급출동한 경찰에 의해 전원 연행됐다. 유치장은 목불인견이었다.
결국 다른 가족들은 그날 저녁 모두 석방됐다. 유재향, 최명식은 2일 구류처분을 받았다. 그날의 짜장면 맛을 잊지 못하는 아이들이 아빠들을 졸랐다. "아빠. 우리 언제 또 데모해요?" 웃기고 슬픈 1973년 겨울이었다.
대통령 연두순시
소위 '짜장면 시위'가 있기 하루 전인 12월 19일 대책위는 청주시장을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노동부에 고발했다. 하지만 청주시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정진동은 지역의 여론만으로는 청소노동자 문제 해결이 어렵겠다고 판단했다. 서울로 올라가 각계에 호소했다. 그 결과 1974년 1월 3일 '청주시청 청소부 근로기준법 수호위원회'가 결성됐다.
위원으로는 지학순 주교, 박청산(노사협의회 회장), 조지송, 이문영, 이창복, 김경락, 김찬국, 조지 오글, 한부만(선교사) 이었다. 1970년대 당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성직자와 학계 인사가 망라한 것이다.
이러한 강력한 우군(友軍)을 바탕으로 정진동과 대책위는 또 한 번의 깜짝 시위를 계획했다. 그해 예정됐던 박정희 대통령의 연두순시에 맞춰 기습시위를 하기로 한 것이다.
시위 예정일 며칠 전부터 정진동과 유재향, 최명식은 잠수를 탔다. 청주경찰서와 청주시청은 난리가 났다. 청주경찰서장은 청주시장에게 "당장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당신이 책임져야 하오"라고 했다.
유신 시대에 시장 자리는 '하루살이'에 불과했다. 마침내 청주시장은 백기를 들었다. 1974년 2월 9일 유재향과 최명식은 복직됐고, 청소노동자들의 요구는 3월 초 100%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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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순시 맞춰 시위를!', 발칵 뒤집혔던 청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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