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봉산 돌담과 작천 마을 돌담오봉산은 한 때 우리나라 최대 구들장 돌 생산지였다. 오봉산 가는 길에 작은 돌담과 큰 돌탑을 만들었다. 더 길고 크게 만들면 유명한 길이 되겠다. 작천마을 돌담길 중 일부는 시멘트로 접착한 곳이 있지만 많은 부분이 자연 그대로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작천 마을 돌담길은 옛날 시골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이병록
이처럼 이순신 장군은 3일간 보성에서 수군 재건 작업을 전개하였다. 조양창에 쌓인 군량을 지금 득량역이 있는 오봉 삼거리를 거처 보성 선소로 옮기고, 보성 선소에 남은 병력과 군선들을 득량만 서쪽 포구인 군영구미로 이동시켰다.
선소 마을은 굴강의 옛 모습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쪽으로 가는 버스가 정류소에 적혀 있는 시간에서 30분이 지나도 오지 않고, 보성읍내로 가는 버스가 와서 오충사로 갔다.
보성은 이순신에게 무과를 지원하라고 권유했던 장인 방진이 군수를 지낸 곳이다. 어느 날 화적들이 안마당까지 쳐들어왔다. 명사수인 방진이 활을 쏘다가 화살이 떨어졌다. 화적들이 종과 내통해 화살을 몰래 훔쳐서, 남은 화살이 없었다. 이때 장차 이순신 장군의 부인이 되는 12살 딸이 배틀 도투마리에 뱁댕이 대나무다발을 힘껏 내던지며 소리쳤단다.
"아버님, 화살 여기 있습니다."
화적들은 그 소리를 듣고 화살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고 도망갔다. 뱁댕이는 남부지역에서 쓰이는 말로, 천을 고정시키거나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대나무다. 보성군은 군수 관사를 '방진관'으로 이름 짓고, 역사, 문화,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보성은 녹차로 유명하여 보성 자랑이 '녹차수도'이지만, 놓쳐서는 안 되는 곳이 오충사다. 칼바위가 가까이 가야만 제 모습을 드러내는 숨겨진 칼이라면, 오충사 충신들은 외적이 침략했을 때, 칼을 뽑아 큰 공적을 세웠다.
전국적으로 잘 알려지지는 않은 얘기라서, 나도 선거이 장군만 알고 갔다. 고려말 이래로 공신만 30여 명 배출하고,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충의의 병역명문가 보성선씨가 있다. 경상 좌수사를 지낸 선극례를 배향 인물로 추가했다고 하니 사실상 육충사다.
면면을 보면, 선윤지는 1382년 전라도 관찰사 겸 안렴사 때 쳐들어온 왜구를 토벌하고 남해 관음포에서 왜구 잔당을 섬멸하였다. 선형은 이시애의 난을 토벌하고, 선세강은 병자호란 시절 안동 영장으로 남한산성을 도우러 가다가 광주 쌍령에서 전사했다.
선거이는 녹둔도에서 여진족을 맞아 함께 싸운 인연으로 충무공 이순신 제독과 절친한 벗과 전우로 지냈다. 한산도 대첩, 행주대첩 등에서 공을 세웠고, 울산왜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오봉산은 한 때 우리나라에서 구들장을 만드는 돌을 제일 많이 생산한 곳이다. 지금은 그런 돌을 이용해 오봉산 산길에 작은 돌담과 큰 돌탑을 곳곳에 쌓았는데, 조금만 더 많이 만들면 아주 멋있고, 유명한 길이 될 것 같다. 작천마을 돌담길도 옛날 시골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한편, 내가 갔을 때는 버스 기사가 관광 홍보대사 역할을 자처해줬다. 정류소가 아닌데 목적지에서 가장 가까운 데 세워주는가 하면, 차를 바꿔 타는 곳을 친절하게 알려줬다.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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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역 해군 제독
정치학 박사
덕파통일안보연구소장
전)서울시안보정책자문위원
전)합동참모본부발전연구위원
저서<관군에서 의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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