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6(좌) 위닝턴 서재에서 책을 보는 모습 (우) 1954년 왼쪽부터 위닝턴이 조 위닝턴 2살 때 함께한 모습(사진제공:밀러)
밀러
"위닝턴은 1930년대 후반, 20대 후반 나이에 '베이징 주재 데일리 워커지 특파원' 기자 생활을 시작합니다. 2차대전 당시 독일이 영국지역에 폭탄을 터뜨렸을 때 위닝턴이 피해자로 치아를 다친 적이 있었어요. 폭탄 피해자였어요. 그 영향으로 반파시즘에 대한 감정과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더욱 깊어진 듯합니다."
- 위닝턴은 한국전쟁기를 역사적 사실 그대로 기록하고자 한 것이 맞습니까?
"위닝턴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이 남침할 때 종군기자 신분으로 남한으로 내려왔습니다. 당시 나이는 40세 정도였으며 남한에 머문 시일은 35일간 정도였다고 합니다. 위닝턴이 머문 지역은 평양, 원산, 서울, 인천, 수원, 조치원. 평택, 대전 등입니다. 대전 골령골 학살지 역사적인 현장을 직접 촬영하고 사실 그대로 일기를 자세히 기록하였어요."
- 위닝턴에게 한국전쟁 시기에 골령골 이외의 지역에서 벌어진 학살 현장 사진이 있습니까?
"타 지역 학살지 사진은 없습니다. 학살 장면을 목격한 지역은 골령골 사건이 유일합니다. 일부 지역의 학살지는 시기와 날짜가 맞지 않았습니다. 다만 위닝턴이 도착했을 때는 학살 후였기에 현장은 거의 산속이라 찾아서 확인할 수도 없었기에 주변의 현장에서 생존자나 유족들의 증언만 듣고 기록에 남겼습니다. 당시 전쟁통에 미군 폭격으로 민간인을 죽이는 것을 너무 많이 보았고 이것도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폭탄을 굳이 민가에 터뜨리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도 아무런 생각 없이 폭탄을 투하했고 죄 없는 민간인 중 여성과 어린아이들을 많이 죽인 것을 볼 때 독일 나치보다 더 잔인함을 느꼈다고 일지에 기록되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