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일총재 모습으로 정길영 저자의 책에서 재촬영했다.
정길영
서일은 청소년 시절 애국심이 강했다. 또 국경 문제 전문가인 김노규 선생과 함경도 지역에서 근대적인 애국계몽운동가이며 경성에 함일학교를 세운 이운협 선생으로부터 배우며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통한 애국심과 학문적 소양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대종교 중광교조 나철을 만나 크게 감화를 받아 대종교 포교를 통한 항일무장투쟁의 거점을 마련하면서 삼일철학을 체계화하였다. 대종교의 수행은 뭇 중생을 참사람이 되게 교화하고 지상천국을 건설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대종교 포교를 불허하고, 1914년에는 대종교 해산 명령을 내렸다. 결국 나철은 일본 천황에게 대한제국의 독립과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장문의 글을 보내고 순교의 길을 택했다.
서일은 1919년 대종교 제2대 교주 김교헌의 권유로 대종교 최고지도자에 오를 수 있었지만 그 에게는 조국 광복 사업이 우선이며 대종교는 오직 항일운동을 수행하는 정신적 지주였다.
스승의 죽음을 본 서일은 무장투쟁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는 이 땅에서 일본을 몰아낼 수 있는 길은 전쟁밖에 없다는 신념으로 10년 동안 강력한 군대를 조직하고 키워왔으며 1920년의 독립 전쟁을 주도했다.
당시 북간도에 사는 동포들에게 서일이 얼마나 존경을 받았는지는 이범석의 회고록을 보면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게 아래 내용이다.
"서일의 도덕과 식견은 북간도와 두만강 이남 함경북도 전반에 걸쳐 중망(衆望)을 한 몸에 받았다."
3.1독립선언서의 전주곡 된 대한독립선언서
서일은 본격적인 대일항쟁에 나서기 위해 일본에 대한 전쟁명분을 공표하며 1918년 '대한독립선언서'를 공표했다. 당시 서일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한 인사들은 39인으로 대일항쟁사의 주역들이다.
김교헌, 윤세복, 김동삼, 신규식, 박은식, 박찬익, 김좌진, 이시영, 이상룡, 신채호, 이동녕, 안창호, 이승만, 등등
대한독립선언서는 2.8 독립선언서, 3.1독립선언보다 먼저 이루어진 것으로 3.1독립선언서의 전주곡이랄 수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당장 일본과 싸울 수 있는 군대가 필요했는데, 당시 상황으로 이 군대를 운용할 수 있는 가장 큰 세력은 서일이었다.
청산리 전투는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 새벽까지 6일간에 걸쳐서 전개된 9개 전투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를 대변하던 <독립신문>의 보도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