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고 보니 가장 큰 장벽은 '내 한계를 스스로 그었던 거' 아닌가 싶다"
권우성
- 대형 회계법인 첫 여성 임원, 첫 여성 파트너, 첫 여성 부대표의 이력을 갖고 있다. 직책 앞에 '첫 여성'이라는 타이틀이 붙는 건 그만큼 많은 장애물들을 헤쳐왔다는 방증 아닌가 싶다.
"지나고 보니 가장 큰 장벽은 '내 한계를 스스로 그었던 거' 아닌가 싶다. 1986년 회계법인에 입사했는데, 그 회사의 첫 여성 회계사가 나였고 나머지 여성들은 모두 비서였다. 그때만 해도 여성이 결혼하면 직장을 그만두는 게 관례였다. 그런데 입사 후 1년도 안 돼 결혼했고, 결혼 1년 후에 배부른 채 회사를 다녔다. 고객사에서도, 회사 내에서도 모두에게 익숙지 않은 풍경이었다. 그런 소수성을 의식하게 됐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지? 스스로 묻게 됐다.
국내 기업을 맡으면 지방 출장을 많이 가게 되고, 출장을 가면 또 술을 마시게 된다. 고객 관리 차원에서 관행처럼 이어져 왔다. 그랬기에 내게 외국계 기업 감사를 맡긴 건 회사의 배려였다. 지금 생각하면 '국내 기업 맡겠다' 했어야 했나 싶지만 그러지 못했다. 용기가 없었다. 남성 중심으로 구성된 조직 내 단 한 명의 여성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불편한 건 없을까'를 생각하느라 나 자신에 집중하기보다는 남을 신경 쓰던 시기다. 견딤의 시간이었다. 자신을 가두던 관례에서 벗어나는 것, 그게 가장 큰 장벽이었다."
- '내가 이 일을 왜 하나 의문을 가졌던 때도 있었지만, 휴직을 했던 기간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다'고 밝힌 기사도 봤다. 복직하며 그 의문이 사라졌던 건가.
"5년 차 때 육아 등을 위해 퇴사했다가 3년 휴직 후 재입사했다. 내 아이들과 함께해야 할 시간을 기회비용으로 치르고 일을 하는 거였다. 대체 가능한 일을 하는 건 그 기회비용을 헛되이 날리게 되는 거였다. 그러면서 성찰의 시기가 왔다. 일의 의미가 뭔지 묻게 됐다."
- 그렇게 찾은 일의 의미는 무엇이었나.
"공인회계사는 공적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미디어 등에서는 돈 있는 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처럼 그려진다. 우리 업의 본질은 공인된 전문가로서 해당 기업에 제 3자의 의견을 제시하고 자본시장에서 자금의 흐름이 효율적으로 움직이도록 돕는 것이다. 이런 역할에 대한 자긍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업의 본질이 명확해지면, 일상 속에서 '이게 옳은 일인지, 내 업에 부합하는 건지' 생각하게 된다. 공인회계사법에 고객 접대 받을 때도 얼마 이상은 안 된다 등 매우 세밀한 규정들이 있다. 독립성을 지키기 위함이다. 그런데 언제나 회색지대가 있다. 행동을 하는 데 있어서 핵심이 '업의 본질'이 되면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이걸 후배들에게도 자꾸 되새기게 해야겠다 마음먹었다.
업의 본질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그걸 사내 교육으로 녹였다. 'Why are you here?'을 회사 곳곳에 붙였다. 그게 결국 가장 중요한 조직 내 품질 관리였다. 숫자를 다루는 조직이다 보니 업의 본질을 생각하라고 하니 어려워 하더라. 그래서 상부 조직부터 다 같이 1박 2일 워크숍을 하고 그 다음 승진자들, 이런 식으로 순차적으로 교육을 진행했다. 조직 문화를 바꾸기 위해 5년여에 걸친 작업을 진행했다."
- 그 작업을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나.
"2010년, 전무이사가 되기 직전이었다. 내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겠다 생각한 게 야망보다는 내가 더 높은 포지션에 가야 내가 생각하는 바들에 대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내 주요 업무는 품질관리였다. 회계법인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고객인 셈이다. 규정이 새로 바뀌면 이걸 안내하는 가이던스(guidance, 길라잡이 역할을 하는 자료)를 만들고, 큰 고객들에 대한 보고서가 나가기 전에 반드시 리뷰하는 등 법인 전체의 위험도를 줄이는 업무다.
또 업무에 대한 리뷰와 피드백을 파트너 평가에 반영하도록 했다. 이전에는 고객을 많이 유치하는 파트너가 인센티브를 많이 받았다면, 이제는 자기가 한 업무를 흠결 없이 잘한 사람에게 가점을 주도록 평가 시스템을 바꿨다. 조직 내 평가가 어떻게 이뤄지느냐에 따라 조직원의 행동 양태가 달라지지 않나. 회계법인이 내놓는 결과물의 질을 높이는 것, 이게 나와 되게 잘 맞았다. 오랫동안 살아남은 비결도 잘 맞는 일을 찾았기 때문도 있다."
"구성원이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구나' 느끼게 만드는 게 좋은 리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