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구례 봉성산 현충공원에 세워진 현충탑과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의 모습. 아이들은 '죽인' 자와 '죽은' 자를 기리는 기념물을 한 곳에 세워두는 게 맞는지 물었다.
서부원
현충공원이 자리한 뒤편 봉성산에는 당시 희생된 이들의 무덤이 있는데, 굳이 군복을 입고 총을 든 이들의 동상을 앞세운 건 어색하기 짝이 없다. 형태도 위치도 상생과 화해의 의미라고 하기엔 너무도 생뚱맞다.
나란히 세워지게 된 사연을 알고나니 더 가슴이 저민다. '여순 사건' 희생자 위령비는 당시 집단 학살이 자행된 서시천 변 공원에 서 있었다. 무심한 세월 속에 위령비를 찾는 발길이 끊기며 관리조차 힘들게 되자 고령의 유족들이 충혼탑과의 '더부살이'를 요청했다고 한다.
당시의 참상을 기억하는 유족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나면 위령비마저 버려질지 모른다는 우려에서다. 명절날 옆 봉분 벌초하듯 충혼탑을 관리할 때 한 번 봐달라는 뜻이다. 그래선지 충혼탑이 우뚝한 자리보다 한 계단 낮은 자리에 마치 임금을 알현하듯 멀찍이 세워져 있다.
지리산 온천 마을 초입에 선 '백인기 대령 추모비' 주변에는 여전히 '여순 반란 사건'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는 이곳에 주둔하던 토벌대의 연대장으로, 지휘관 회의 참석차 부하 2명과 함께 길을 나섰다가 공비들의 습격을 받고 포위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비석을 세우고 현충 시설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지금이야 봄마다 산수유 축제가 열리는 온천 휴양 지역으로 유명하지만, 이곳은 당시 주민 대다수가 '반란군'의 부역자로 내몰려 집단 학살당한 참혹한 현장이었다. 토벌대에 의해 '대살(代殺)'까지 자행되며 마을 공동체가 풍비박산났다. 이곳의 붉은 산수유 열매에서 그들의 피를 떠올리는 이들도 있다.
추모비 옆 그의 행적을 적은 안내판엔 '여순 사건'이라고 적힌 어설픈 테이프 자국이 보인다. 반투명이어서 그 아래로 '여순 반란 사건'이라는 단어가 또렷이 비친다. '여순 반란 사건'이 '여순 사건'으로 공식화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나름 소중한 교육 자료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