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무술을 좋아했던 강신만. 무등산에서 수련을 하고 있다.
강신만
"저는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어요. 종목은 가리지 않고 골고루 다 좋아합니다. 특기가 무술이에요. 학생운동할 때도 경찰에게 한 번도 잡히지 않았어요. 저 잡으려면 사복 경찰이 한 트럭이 와야 한다고 했죠(웃음)."
강신만은 다른 사람의 얘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다. 친구들의 연애 상담도 곧잘 해주었다. 상담자의 역할을 많이 했다.
"술 마시고 저에게 전화하는 친구들이 많았어요(웃음)."
다정다감한 성격은 아니지만 말없이 친구들의 아픈 이야기를 들어주던 강신만, 그에게도 아픈 사연이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시골에서 도시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집안이 정신없었다. 육성회비를 제 때에 못 냈다.
"등록금을 제 때 안 갖고 왔다고 선생님에게 맞았어요. 엄마가 안 줘서 안 갖고 왔다고 하니까 거짓말한다고 맞았고, 그 일로 학교에 가기 싫어서 안 갔더니 결석했다고 맞았어요. 학교만 가면 선생님이 때리니까 학교에 안 갔어요. 자주 맞다가 4학년 때 대보름날, 교실 책상을 친구들과 함께 학교 근처 동산으로 옮기고 모두 태웠어요. 소방차가 오고 난리도 아니었죠. 그 일로 학교에서 잘렸어요.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이라 잘렸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2년 정도 쉬다가 복교했어요. 5학년은 한 달 밖에 안 다녔어요. 바로 6학년이 되었죠."
요즘 같으면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다.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뿐만 아니라, 지방의 사립학교는 아이들을 많이 때렸다고 한다. 특히 남학생들은 많이 맞았다. 학교에 정 붙이고 다닐 수가 없었다. 체육을 한다고 공부를 등한시했지만 교사의 폭력이 공부를 등한시하는 데 한몫했다. 강신만은 공부 대신에 무술을 아주 잘했다. 전국 대회에서 네 번이나 우승을 했다.
강신만은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 1년 때인 1980년 5월, 학교에 낙서 사건이 있었다. 화장실 벽에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고 크게 쓰여 있었다. 유인물도 뿌렸다. 학교는 조사를 했고 범인을 잡았다. 낙서하고 유인물 뿌린 학생은 구속되었다. 그 학생을 석방시키기 위해 강신만은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심한다. 학생회장으로 출마한다는 것은 구속까지 각오해야만 했다. 당시에는 고등학생도 삼청교육대에 보낸 시절이다. 간선제 학생회였기 때문에 1, 2학년 반장들이 강신만을 학생회장으로 추대하고 접수를 하러 교무실에 갔다. 담당 교사가 강신만에게 물었다.
"너 성적이 '우' 이상 돼?"
"아니요. 저 대부분 '가'인데요."
"그러면 '가' 이새끼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접수를 해야겠다고 우겼다. 그러자 선생님은 의자를 들고 강신만을 때렸다. 결국 등록을 하지 못한 채 교무실을 나왔다. 강신만을 추대한 친구들은 데모를 하자고 했다. 강신만도 그러고 싶었으나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날 이후 강신만은 태권도 도복을 박스에 집어넣고 공부를 했다. 고3, 1월부터 하루에 네 시간밖에 안 자고 미친 듯이 공부했다. 화장실 갈 때도, 밥 먹을 때도 책을 들고 살았다. 공부하다가 코피를 흘린 기억은 그의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다.
"교사들의 폭행으로 공부할 결심을 한 것은 '역 교육'이라고 좋은 방법이 아니에요. 반발심에서 한 공부잖아요. 어쨌든 저는 그 사건을 계기로 죽도록(?) 공부했고 교사가 되었어요. '나는 그런 교사가 되지 말자'는 다짐을 하면서요. 교사가 되어서 제일 먼저 없애려고 한 게 '반장, 부반장 뽑을 때 성적으로 제한을 두지 말자'는 거였어요. 그런데 여전히 남아 있더라고요. 교사한 지 20년이 넘었는데도 안 바뀌었어요. 김대중 정부 때 이해찬 교육부 장관의 공문 한 장으로 성적 제한이 없어졌어요."
강신만은 교사가 되고 전교조에 가입했다. 전교조 활동으로 수십 년 넘게 있던 촌지를 없앴고, 교장의 제왕적 권위주의를 민주적으로 바꿨다.
'미국 태권도 선생님'이 꿈이었지만
고등학교 때 선생의 폭력으로 공부를 시작했지만 반드시 교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대학 4학년 때 교생실습을 하러 가서다. 6주 간의 교생실습을 했는데 아이들이 너무 예뻤다. 원래 그의 계획은 '서울대 사범대 체육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의 하버드대로 유학을 간다'였다. 미국에서 태권도를 전공하고 미국 전역에 태권도를 알리는 게 꿈이었다. 미국에서 먼저 자리 잡은 선배들이 도와준다고도 했다. 장밋빛 꿈은 '서울대 사범대학에 입학하는 것'까지만이었다. 학생운동을 하면서 미국 이후의 계획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학생운동을 하고 교육운동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은 시대적 책무 때문이에요. 원래 꿈꾼 길로 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여전히 있어요. 다시 태어난다면 내가 좋아하는 길(미국에 가서 태권도를 알리는)을 걷고 싶어요."
비록 좋아하는 길로 가지 못했지만 교육 운동의 길은 계속 가기로 했다. 강신만은 현재 '생태 중심 교육 추진단' 단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교육의 비전을 생태 중심으로 놓고 교육의 시스템을 생태적으로 바꾸는 활동을 한다. 누군가를 배제하고 왕따 시키는 학교가 아니라, 공존하고 상생하는 학교를 만드는 것에 앞장서는 일이다. 치열한 경쟁 교육이야 말로 지구를 위기에 빠트린 주범이다. 공존하고 상생하고 인간 중심의 교육을 하려면 인간도 자연계의 하나라는 생태중심으로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