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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가 아닌 KT, 어느 엄마가 이걸 만든 이유

선천 질환 환자들 위한 단체 만든 지 10년... 한국 의료계에 여전히 남아 있는 숙제

등록 2024.11.19 11:56수정 2024.11.19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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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16일, "함께 걸어요, KT"라는 이름의 온라인 커뮤니티를 개설했다. 통신사 KT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이 곳은, 내 아이가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난 질환 KT(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이름을 따서 만든 곳이다. 지난 10년 사이에, 이 커뮤니티는 비영리임의단체로 성장했다. KT와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 선천성 복합혈관이상질환을 지칭하는 PROS(PIK3CA-Related Overgrowth Spectrum)라는 이름을 달고서.

 지난 16일, 온라인 커뮤니티 10주년 행사가 있었다
지난 16일, 온라인 커뮤니티 10주년 행사가 있었다서이슬

처음 온라인 커뮤니티를 만들었을 때도, 2020년에 비영리임의단체로 등록했을 때도, 내게는 이곳을 단순한 '환우회' 이상으로 만들겠다는 꿈이 있었다. 흔히 환우회, 환자단체는 환자들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이익단체'로 여겨지지만, 반드시 그 방향만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장 환자들에게 절실한 것들에 대해 목소리를 내면서도 그 이상의 사회적 역할을 하는 곳으로 만들고 싶었다.

희소질환자들에게 필요한 제도적 지원을 얻어내는 데 그치지 않고, 희소질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고 조금 다른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도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지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었다.

희소질환자들에게 '지역의료', '필수의료'는 먼 얘기

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다. 사는 곳 근처에 있는 상급종합병원에는 아이의 희소질환을 봐줄 의사가 없었고, 내 아이를 포함한 우리 회원들은 서울 빅5 병원으로 가야만 했다. 유전의학과, 혈관외과, 성형외과, 정형외과, 신경외과, 재활의학과 등 다양한 진료과의 협진이 절실하지만, 너무 바쁘고 분절적인 한국 의료 환경에서 협진 체계는 불가능했다. 그렇게 부산, 대구, 대전, 제주, 강원에 사는 우리 회원들의 대다수가 빅5병원 중 한 곳을 월 1, 2회씩 다녀가야 했고, 그러면서 지쳐갔다.

그렇게 지쳐가는 회원들을 붙들고 감히 우리의 사회적 역할을 말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검사하고 지켜보며 그때그때 증상을 완화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경우가 많아서, 정기검진과 대증치료를 포기하고 그냥 사는 회원도 생겨났다. 몇몇 회원은 아예 커뮤니티 활동마저 중단해 연락이 끊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포기하고 지내다 어느날 갑자기 증상이 악화되었다며 다시 커뮤니티에 접속하는 분들을 볼 때마다 답답함을 감출 수 없었다. 통증과 출혈, 보행장애, 우울증 등으로 힘들어하는 분들일수록 서울 빅5병원보다는 사는 곳 근방에 있는 병원에서 치료받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여전히 그런 지역 병원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올해 들어 유난히 자주 회자되는 '필수의료'도 마찬가지다. 선천성 복합혈관질환 환자들에게는 진단을 위한 영상촬영도 필수의료고, 약물치료 가능성을 보기 위한 유전자검사도 필수의료고, 선천적으로 있는 하지정맥류를 치료하기 위한 시술도 필수의료다. 하지만 앞의 두 가지는 당장 생명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하지정맥류 시술은 '미용시술'이라는 이유로 비필수의료, 비급여진료가 된다.

올해 의정갈등이 장기화하는 동안, 당장 내 아이의 유전자검사가 6개월씩 밀린 이유도 다르지 않다. 표면적인 이유는 전공의 집단사직이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필수의료가 아니어서'였을 것이다. 이렇듯 지역의료, 필수의료는 희소질환 환자들에게도 절실한 문제인데 해결이 요원하다.


'환자 중심'이 아니라 '시장 중심' 의료 환경

환자가 아니라 시장 중심으로, 수가와 비급여진료와 실손보험으로 돌아가는 의료현장은 한국 의료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다. 질환의 치료와 관리, 재활을 위해 수많은 날을 병원에서 보내본 입장에서, 환자들은 우리 의료 환경에 어떤 문제가 있고 이를 해결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의료 정책과 제도가 의료공급자 중심으로 만들어져 왔기 때문에, 정책과 제도를 설계하고 실행하는 데 있어 환자의 목소리가 반영될 여지가 적었다. 고가의 신약, 비급여 의료비, 간병비, 장애 친화적 의료환경 등 환자 입장에서 절실한 문제들이 정책 의제화되지 못 하고 그때그때 일부분만 제도권으로 편입되거나 시범사업의 형태로 시행되어온 것이 현실이다.

이제 우리는 환자의 필요와 국민 일반의 이익을 우선순위에 놓는 '환자중심 의료'를 구축해야 한다. 그리고 환자중심 의료환경을 만드는 데는 앞서 얘기한 지역의료·필수의료 강화를 포함해 올바른 의료전달체계 확립, 보건의료 인력의 충분한 공급과 적절한 배치,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등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한 해가 저물어가는 지금까지도 이러한 논의는 전혀 쟁점이 되지 않고 있다.

환자 중심 지역의료와 필수의료, 우리가 요구해야

 환자중심 의료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환자중심 의료환경을 만들어야 한다.marceloleal80 on Unsplash

현재까지 한국의 의료는 양적 성장에 집중해 왔다. 그 결과 전국 70개 중진료권의 90%가 병상 과잉 지역이 되었지만, 그만큼의 질적 성장을 이루어내지는 못했다. 그간 이뤄진 양적 성장이라는 것이 한 지역에 소규모 민간병원이 우후죽순 들어서면서 발생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자에게 필요한 양질의 지역의료 제공을 위해서는 주요 진료과를 모두 포함하고 있어 종합적인 대처가 가능한 300병상 이상 규모의 지역거점 병원이 있어야 한다.

그냥 300병상 이상의 병원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 시장 논리가 지배하는 민간병원만으로는 지역의료와 필수의료를 해낼 수 없다. 이제는 환자중심 공공의료를 제공하는 의료기관이 우리나라 전체 의료환경을 선도해나갈 수 있도록 정책적, 제도적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지역을 불문하고 환자와 국민 누구나 각자에게 필요한 필수의료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어떤 경우에도 필수의료 공급이 중단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비수도권에 산다고 해서, 희소질환을 갖고 있다고 해서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 누구나 치료접근권과 건강권, 삶의 질을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다른 누구보다도 우리 스스로가 요구해야 한다. 환자중심 의료환경을 만드는 힘은 의료인, 정책전문가, 정치인이 아니라 환자에게, 우리 국민에게 있다.
#의료공공성 #공공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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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활동가로 살고 싶은 사람. 아이의 선천성 희소질환 '클리펠-트레노네이 증후군(KT 증후군)'을 계기로 <아이는 누가 길러요>를 썼다. 한국PROS환자단체 대표, 부천시 공공병원설립 시민추진위원회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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