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온라인 커뮤니티 10주년 행사가 있었다
서이슬
처음 온라인 커뮤니티를 만들었을 때도, 2020년에 비영리임의단체로 등록했을 때도, 내게는 이곳을 단순한 '환우회' 이상으로 만들겠다는 꿈이 있었다. 흔히 환우회, 환자단체는 환자들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이익단체'로 여겨지지만, 반드시 그 방향만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장 환자들에게 절실한 것들에 대해 목소리를 내면서도 그 이상의 사회적 역할을 하는 곳으로 만들고 싶었다.
희소질환자들에게 필요한 제도적 지원을 얻어내는 데 그치지 않고, 희소질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고 조금 다른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도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지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었다.
희소질환자들에게 '지역의료', '필수의료'는 먼 얘기
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다. 사는 곳 근처에 있는 상급종합병원에는 아이의 희소질환을 봐줄 의사가 없었고, 내 아이를 포함한 우리 회원들은 서울 빅5 병원으로 가야만 했다. 유전의학과, 혈관외과, 성형외과, 정형외과, 신경외과, 재활의학과 등 다양한 진료과의 협진이 절실하지만, 너무 바쁘고 분절적인 한국 의료 환경에서 협진 체계는 불가능했다. 그렇게 부산, 대구, 대전, 제주, 강원에 사는 우리 회원들의 대다수가 빅5병원 중 한 곳을 월 1, 2회씩 다녀가야 했고, 그러면서 지쳐갔다.
그렇게 지쳐가는 회원들을 붙들고 감히 우리의 사회적 역할을 말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검사하고 지켜보며 그때그때 증상을 완화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경우가 많아서, 정기검진과 대증치료를 포기하고 그냥 사는 회원도 생겨났다. 몇몇 회원은 아예 커뮤니티 활동마저 중단해 연락이 끊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포기하고 지내다 어느날 갑자기 증상이 악화되었다며 다시 커뮤니티에 접속하는 분들을 볼 때마다 답답함을 감출 수 없었다. 통증과 출혈, 보행장애, 우울증 등으로 힘들어하는 분들일수록 서울 빅5병원보다는 사는 곳 근방에 있는 병원에서 치료받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여전히 그런 지역 병원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올해 들어 유난히 자주 회자되는 '필수의료'도 마찬가지다. 선천성 복합혈관질환 환자들에게는 진단을 위한 영상촬영도 필수의료고, 약물치료 가능성을 보기 위한 유전자검사도 필수의료고, 선천적으로 있는 하지정맥류를 치료하기 위한 시술도 필수의료다. 하지만 앞의 두 가지는 당장 생명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하지정맥류 시술은 '미용시술'이라는 이유로 비필수의료, 비급여진료가 된다.
올해 의정갈등이 장기화하는 동안, 당장 내 아이의 유전자검사가 6개월씩 밀린 이유도 다르지 않다. 표면적인 이유는 전공의 집단사직이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필수의료가 아니어서'였을 것이다. 이렇듯 지역의료, 필수의료는 희소질환 환자들에게도 절실한 문제인데 해결이 요원하다.
'환자 중심'이 아니라 '시장 중심' 의료 환경
환자가 아니라 시장 중심으로, 수가와 비급여진료와 실손보험으로 돌아가는 의료현장은 한국 의료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다. 질환의 치료와 관리, 재활을 위해 수많은 날을 병원에서 보내본 입장에서, 환자들은 우리 의료 환경에 어떤 문제가 있고 이를 해결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의료 정책과 제도가 의료공급자 중심으로 만들어져 왔기 때문에, 정책과 제도를 설계하고 실행하는 데 있어 환자의 목소리가 반영될 여지가 적었다. 고가의 신약, 비급여 의료비, 간병비, 장애 친화적 의료환경 등 환자 입장에서 절실한 문제들이 정책 의제화되지 못 하고 그때그때 일부분만 제도권으로 편입되거나 시범사업의 형태로 시행되어온 것이 현실이다.
이제 우리는 환자의 필요와 국민 일반의 이익을 우선순위에 놓는 '환자중심 의료'를 구축해야 한다. 그리고 환자중심 의료환경을 만드는 데는 앞서 얘기한 지역의료·필수의료 강화를 포함해 올바른 의료전달체계 확립, 보건의료 인력의 충분한 공급과 적절한 배치,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등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한 해가 저물어가는 지금까지도 이러한 논의는 전혀 쟁점이 되지 않고 있다.
환자 중심 지역의료와 필수의료, 우리가 요구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