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석봉, 유성 의병 사적비
국가보훈부
국가보훈부 공훈록에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최초로 거의한(의병을 일으킨) 그의 봉기는 의병 활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기폭제 역할을 한 것으로서 의병사에 큰 의미를 갖는다'라는 기술이 있다. 그는 누구일까?
그는 문석봉(文錫鳳)이다. 1851년 대구 현풍에서 태어나 관직에 종사하다가 1896년 고향으로 돌아와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45세였다.
의병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 인물
문익점의 후손인 그는 과거를 통과하지 않은 채 벼슬길에 들어 32세 때 조운(세금으로 거둔 곡식 등을 배로 운반하는 일) 담당 관리로 재직했다. 그런데 목포와 무안 사이를 통과할 때 백성들이 굶주려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이때 그냥 지나치는 성미였으면 그렇고 그런 대로 한평생 무난하게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천성이 그렇지 못했다. 조정으로 가져가야 할 세곡을 풀어 백성들의 죽음을 구제했다.
세곡을 풀어 백성들의 죽음을 막았다
관청 또한 속성상 그런 일을 두고만 볼 수는 없는 곳이다. 즉각 체포령이 떨어졌다. 문석봉은 정읍으로 달아나 방장산 깊은 골짜기에서 숨어 지냈다. 연좌제가 횡행하던 시절이었으므로 동생 문익봉이 붙잡혀가 처형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산속으로 밥을 날라주던 동료와 부하들이 그 소식을 문석봉에게 전했다. 문석봉은 "아무 죄도 없는 동생이 죽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면서 형조(법무부)가 발행한 것처럼 가짜 공문서를 위조했다.
가짜 공문서 만들어 처형 위기 동생 구출
마침내 동생은 풀려났지만, 문석봉 본인에 대한 수배령이 해제될 리는 없었다. 친하게 지내왔을 뿐만 아니라 문석봉에게 중죄를 묻는 것은 옳지 않다고 믿는 현감 어병선 등이 조정에 "문석봉이 백성을 구제한 것일 뿐 달리 죄는 없으니 너그러이 다루어 주소서!"라는 요지의 상소문을 올렸다.
이윽고 석방된 문석봉은 1893년 정식으로 무과에 급제했다. 그해 연말 진잠 현감이 되고, 이듬해 양호 소모사(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에서 군사를 모으는 관리)가 되었다. 그 후 1895년 공주부 신영(새 군대) 영장(군대 최고 지휘관)이 되었다.
과거에 합격해 이제는 잘 살아가려나 했지만
누군가가 잘 되면 해롭게 하려는 자가 나타나는 것이 세상 풍속이다. "문석봉이 일본군을 공격하려 한다"는 투서가 조정에 접수되고(실제로 그런 준비를 했으니 모함은 아니었다), 그는 서울로 압송되어 옥에 갇혔다.
4개월 뒤 옥에 풀려나고 사면도 되었지만 그의 생애를 결정적으로 바꾸는 사건이 일어났다.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었다. '국모'가 외적과 반역자들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유림이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그 중 원수를 갚기 위해 가장 먼저 창의한 사람이 바로 문석봉이었다.
1985년 11월 4일 공주 유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문석봉이 송근수, 신응조 등과 함께 창의한 이른바 '유성 의병'은 조선 후기 최초의 의병이었다. 그래서 국가보훈부 공훈록이 '그의 봉기는 의병 활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기폭제 역할을 한 것으로서 의병사에 큰 의미를 갖는다'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소수 의병이 거대 관군을 이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회덕현을 급습해 탈취한 무기로 군장을 꾸린 문석봉 의병군 400여 명은 공주부 관찰사 이종원이 보낸 관군을 이겨낼 수 없었다. 대패와 의병군 해체를 겪은 문석봉은 고향으로 돌아와 재기를 모색했다. "그대에게 현상금 만금이 걸렸네. 잠시 몸을 피해 뒷날을 도모하시게"라며 걱정해준 초계 군수 신태철도 있었지만, 고령 현감 조아무개는 잽싸게 고변을 했다.
결국 문석봉은 1896년 1월 4일 체포되어 대구감옥에 갇혔다.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조속 처형 압력을 넣었지만 조선인 관리들의 우호적 행정 지연에 힘입어 문석봉은 탈출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조선인 관리들의 우호에 힘입어 탈옥하다
문석봉은 창의 때부터 동지였던 오형덕, 최은동과 함께 경기도 과천으로 갔다. 과천은 문석봉이 한때 포군장으로 재직했던 연고지였다. 이들은 제천의 유인석 의병장과 힘을 합쳐 재기 방안을 모색했다.
하지만 문석봉은 이미 몸에 깊은 병이 들어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요양차 고향 현풍에 돌아왔지만 11월 9일 45세 나이로 운명하고 말았다. 을미의병 최초 의병장 문석봉,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가 눈물겹다.
그렇게 살다 가신 지사에게 우리는 너무 무심
그의 생가 터 앞에 서면 더욱 애잔해진다. 그의 생가 터(달성군 현풍면 성하길 68-7)에는 독립운동 정신을 현창하는 아무런 표식도 없다. 국가보훈부가 "의병사에 큰 의미를 갖는" 인물이라는데도, 고향 관청은 '나몰라라'이고, 시민들도 그의 이름이나마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는 세미를 풀어 사람들을 살렸는데 왜 사람들은 이토록 무심할까?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