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준비하는 러너들 모습
어혜란
얼핏 남편을 통해 2000여 명의 참가자들이 신청했다는 것을 듣기는 했으나, 수많은 러너들을 마주하니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입이 떡 벌어졌다. 평생 뛰는 일이라면 질색팔색을 하고 살아왔던 나에겐 그저 놀랍고 신기한 풍경이었다.
러닝 열풍이 불면서 모 스포츠 회사의 러닝화가 불티나게 팔린다더니. 괜한 말이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이들과 같은 그룹에 속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으면서도 내심 뿌듯했다.
'아, 나도 이제 마라토너구나.'
위례 폭주, 달리는 우리, 재미있는 문구를 적은 티셔츠를 삼삼오오 맞춰 입은 러너들도 눈에 띄었다. 부부, 아이를 포함 가족 단위로 찾은 사람들도 많았다.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10km를 도전한다는 얘기는 얼마나 놀랍던지.
개중에는 한겨울 추위도 잊은 듯 반팔, 반바지 차림을 하고 일회용 우의를 가운처럼 두른 사람들도 있었다. 이색적인 광경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단잠을 물리치고 사서 고생(?) 하겠다고 모인 러너들의 열기는 대단했다.
황금 같은 주말도 반납하고 칼바람이 부는 운동장 한복판에 서 있었지만, 사람들의 얼굴엔 한결같이 부푼 기대감과 설렘이 가득했다. 잠시 후 펼쳐질 자신만의 각본 없는 인생역전 드라마가 무척 기대된다는 듯.
'이번엔 또 얼마나 기록을 단축하게 될까?'
'완주할 수 있을까?'
'목표 킬로수를 달성할 수 있을까.'
저마다 새로운 목표를 품에 안고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나갈 생각에 모두들 한껏 들떠 보였다. 덩달아 첫 마라톤 대회를 앞둔 내 가슴도 어느새 두려움은 사라지고 '불끈' 열정이 솟아올랐다. 남편의 등쌀에 못 이겨 얼떨결에 참여하게 된 마라톤이지만 어쩐지 앞으로 '마라톤 덕후'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경기장의 뜨거운 열정이 나를 사로잡았다.
한 시간여를 기다리니 남편의 회사 동료도 슬슬 도착하고, 스트레칭 타임이 찾아왔다. 잠실 에어로빅 동호회 회원분들이 지도해 주셔서 신나는 음악과 함께 유쾌하게 몸을 풀 수 있었다.
함께하면 멀리 갈 수 있다
곧이어, 11월 17일 오전 9시 제10회 한성백제 마라톤이 시작되었다. 러너 무리가 출발선 앞에 서고, 출발 휘슬이 울리자 수백 명이 한데 모여 달리기 시작했다. 대회 관계자들이 흥겹게 응원해 주고 있었다. 함께 뛰는 사람들과 앞을 다투며 자리를 잡고 뛰기 시작했다.
사실, 10km는 첫 도전이었다. 경기 전, 남편과 여러 번 예행연습을 했지만 5km 넘기지 못했다. '너무 목표를 높게 잡은 것은 아닐까', '내가 해낼 수 있을까' 긴장되고 걱정되면서도 파도에 휩쓸리듯 참가자들의 뒤를 쫓았다.
갑자기 하강한 기온 탓에 칼바람이 몸을 파고들었지만 춥기는커녕 오히려 시원했다. 찬바람을 가로지르며 달리는 기분이 상쾌했다. 공원 둘레길을 따라 뛰는 코스였는데, 알록달록 곱게 치장한 나무들을 보면서 달리니 힐링 됐다. 뒤로 물결치듯 지나가는 단풍이 아름다웠다.
10분 정도가 지나자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쇳소리 비슷한 굉음이 새어 나왔다. 어느덧 즐거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고통의 시간만 남았다. 거북이처럼 달리다 보니 계속 나를 추월하는 인파가 생겨났다.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에이, 나도 페이스 올려?'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휩쓸리지 않고 '내 페이스에 집중하자!' 속으로 외치며 속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여러 번 훈련을 통해 '마이페이스'(뛸 때 편안함을 느끼는 속도)를 맞춰 놓은 덕분이다.
반환점인 5킬로미터 구간을 넘자 고비가 찾아왔다. 헉헉 숨이 차오르고 종아리와 무릎이 아팠다. 10킬로도 쉽지 않은데 풀코스를 뛰는 사람들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어떻게 멘탈을 유지하는지 정말 대단해 보였다.
'아~ 힘들어. 진짜 힘들다.' 목울대를 타고 불만이 터져 나왔다. 옆에서 뛰고 계신 분이 재미있었는지 하하 웃으시면서 "파이팅! 파이팅!"을 외쳐주셨다. 은근 힘이 됐다.
옆을 돌아보니 모두들 인상을 한껏 찌푸린 채 버티고 있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함께 고통을 감수하며 달리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니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위안이 됐다. 10킬로미터의 벽은 만만치 않았다. 수시로 걷고 싶다는 유혹이 찾아왔다. 하지만 여기서 걷는다면 다시 뛰는 것은 불가능하다.
'힘들지만 참고할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달려보자.'
6km, 7km, 8km 그리고 마침내 10km!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고통의 시간 끝에 드디어 운동장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우와! 드디어 결승선이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함성이 터졌다.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내리 10킬로미터를 달리다니. 인생 최고 기록이었다. 함께 달리는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러너들과 함께 뛰지 않았다면 절대 얻지 못했을 결과였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면 함께 가란 말이 떠올랐다. 함께 뛰는 사람들을 보며, 응원을 받으며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누그러 트릴 수 있었다. 힘을 낼 수 있었다. 달리는 도중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남편은 유난히 반가웠다. 함께 뛴다는 사실 만으로도 큰 위안이 됐다.
결승점을 통과한 후 간식과 매달을 받아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을 남편을 찾았다. 이리저리 둘러보니 운동장 한편에 서있는 남편과 동료분의 모습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여보" 하고 부르니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쳐다본다. 당연히 두 시간을 너끈히 채우고 겨우 결승선을 통과하는 나의 모습을 예상했던 남편은 "벌써 왔어?" 하며 어찌나 놀라던지. 모두의 예상을 뒤엎었다는 생각에 짜릿함은 배가 됐다.
'1시간 15분.'
힘들었지만 예상보다 좋은 기록에 기분이 좋았다. 눈물이 차오르며 울컥, 마음이 웅장해졌다. 감격스러웠다. 호흡곤란과 고통스러운 순간이 찾아오며 고비가 얼마나 많았던가. 모든 위기를 무사히 이겨내고 '걷지만 말자' 목표를 이룬 나 자신이 너무 대견했다. 남편과 동료분도 모두 자신의 기록을 경신했다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삶이 권태롭거나 용기가 필요하다면
고작 10km를 완주했을 뿐인데, 마치 풀코스라도 뛴 듯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어떤 불가능한 일도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운동으로 얻은 성취감은 삶의 다른 부분으로 확장된다. 다른 일도 해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달리는 건 신체뿐 아니라 정신력을 강화시키는데도 좋은 영향을 미친다. 스트레스로 마음이 복잡한 날뛰다 보면 머리가 맑아지는 경험을 자주 했다. 일상 속에서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잠잠히 가라앉히고 감정을 조절하는데도 좋다.
호흡을 고르며 달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안정되고, 몸과 마음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기 신뢰를 갖게 된다. 러닝만큼 나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고 성장시키는 운동이 또 있을까? 큰돈도 들지 않고 어디에서든 내 몸 하나만 있으면 시작할 수 있으니 가성비로도 따라올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