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의원의 '평생 동지'이자 아내, 인재근

등록 2000.06.09 09:32수정 2000.06.09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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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전쟁 이후 오랜 군사독재정권의 폭압적인 통치로 인해 한국사회는 인권과 절차 민주주의가 생략된 채 비정상적으로 발전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의 온 삶을 받쳐 온 것또한 사실이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83년 민청련 초대의장을 지내면서 1980년대와 1990년대 초 네 차례에 걸쳐 7년반 동안 지명수배와 구속, 그리고 얼마 전 자수한 고문 기술자 이근안으로부터 1985년 남영동에서 심한 전기고문을 받은 사람이 있다.

1965년 학생운동에 투신한 이래 줄곧 우리사회의 민주화와 독재정권에 맞서는 싸움에 앞장서 온 재야지도자로서 피신과 투옥으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왔고 지난 1996년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에는 민주당과 국민회의 부총재를 지냈으며 올해 4월에 있은 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유난히도 치열했던 수도권 지역에서 무난히 당선된 사람.

최근 들어서는 각종 언론이 실시하는 21세기 한국정치를 이끌어갈 차세대 주자로 빠지지 않는 등 7·80년대 민주화운동세력의 대부에서 이제는 차세대 정치지도자로 떠오를 정도로 자신의 튼튼한 정치 영역을 만들어가고 있는 김근태 의원이 있기까지는 아내이자 '평생 동지'인 인재근씨의 역할을 빠뜨릴 수 없다.

아내 인재근 씨는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서슬 퍼런 폭압정치가 극성을 부리던 1985년 9월 김 의원이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 기술자 이근안으로부터 8차례의 전기고문과 두 차례의 물고문 등 혹독한 고문을 받아 자칫 목숨까지 잃을 뻔 했던 사실을 '여자'의 몸으로 세상에 알려 내 국민들의 경악과 분노를 일으켜 우리 사회에 고문추방운동을 본격적으로 일으킨 사람이기도 하다.

16대 국회 개원준비로 한창인 5월 중순,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인재근씨를 만나 20여년에 걸쳐 김근태 의원을 뒷바라지하면서 겪었던 그의 삶을 들어봤다.


광주민주화운동 20주년이 되는 5월 18일 오후, 장애어린이 집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오는 길이라며 화장기 조차 없는 평범한 얼굴에 푸근한 웃음을 머금고 약속시간에 정확히 맞춰 나타난 인재근씨는 "고생은 무슨 고생이요. 다만 고향인 교동도에서 계속 살았다면 남다른 고생을 하지는 않았을 지 모르죠"라며 김근태 의원과의 인연의 고리를 풀어 헤쳤다.

1953년 경기도 강화에서 조금 더 들어가는 섬 '교동도'에서 태어난 인재근씨는 태어나자마자 잠시 부모를 따라 인천으로 옮겼다가 젖을 뗀 뒤 어머니와 떨어져 다시 교동도로 가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교동도를 떠나면서부터 부부이자 평생동지가 된 김근태 의원과의 파란만장한 인연이 시작된다.

1970년대 초 당시 우리사회는 박정희 정권의 독재가 기승을 부려 각계에서 박정권을 반대하는 저항이 일어났고 그만큼 이들에 대한 극악한 탄압이 자행되는 시기였다. 뿐만 아니라 대학가에서도 박정희 독재를 반대하는 학생운동의 물결이 거센 탄압에도 불구하고 더욱 타오르고 있을 때였다.

이러한 시기에 이화여대 사회학과에 입학한 인재근 씨는 1학년 때부터 교내 서클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이다.

30여년 전, 한창 젊었을 시절을 생각하는 것이 못내 쑥쓰러웠던지 조금은 상기된 얼굴의 인재근 씨는 "대학교 1학년 때 시작한 학생운동이 인연이 돼서 김근태 씨를 만난 것"이라며 7·80년대를 더듬기 시작했다.

김근태 의원과 부인 인재근 씨는 70년대 중반 우연반 필연반으로 만나게 됐다. 한 선배로부터 "서울대를 나와 '운동'을 하고 있고 가난하지만 사람 좋은 신랑감이 있다"는 말을 들은 인재근 씨가 어느 날 우연히 그 선배 집에 갔다가 그 곳에 들른 김 의원을 만난 것이다.

"처음봤을 때 인재근씨가 명랑하고 당차서 좋았다"는 김근태 의원과 달리 인재근씨는 "당시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지명수배 중이던 김근태 씨가 조금은 우울해 보였지만 몇 번 만나면서 따뜻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아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다 김 의원이 '막내'라는 사실이 결혼을 결심하는 데 더욱 도움이 됐다고 털어 놓는다.

"어머니가 종갓집 맏며느리였어요. 저도 맏딸이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장남에게는 절대로 시집보내지 않겠다는 말을 인이 박힐 정도로 들었지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김근태씨가 '막내'였고 그게 좋았습니다."

두 사람은 78년 결혼을 했지만 2년 뒤인 80년에야 뒤늦은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당시 김 의원이 민청학련 사건과 75년 긴급초처 9호 위반 혐의 등으로 도피생활을 했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었지만 이로 인해 집안 살림과 가정경제 역시 고스란히 인재근씨의 몫으로 돌아왔다.

인재근 씨는 이때부터 김 의원이 10·26으로 긴급조치 9호가 해제돼 자유로운 몸이 될 때까지 공장을 다니면서 자신의 삶인 '운동'과 '집안생계'를 책임지는 고단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힘든 시기에 그나마 인재근씨를 위로해준 것은 결혼 초에 두 사람이 약속했던 '평등부부로 살자'는 다짐이다. 물론 집에 올 수 없는 날이 더 많았지만 곁에 있는 날만큼은 남편이 그때나 지금이나 이 약속을 지켜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가 운동을 하는 상황에서 누구 한 명의 일방적인 희생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가사노동을 분담키로 했지요. 저는 이불 게는 것과 청소하는 것이 싫었고 김근태씨는 요리하는 것이 싫다고 해 서로 역할을 나눠 지금까지 이 약속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요즘 젊은 신세대 부부에게 당부하는 말로 "전업주부로 있으면서 남편에게 가사일 분담을 요구하는 것은 일정한 한계가 있다"며 "평등 부부를 유지하려면 부부가 서로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조언을 잊지 않는다.

결혼 후 줄곧 어려움이 끊이지 않았지만 인재근씨에게 남달리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는 데 바로 민청련 사건으로 구속된 남편이 남영동에서 심하게 고문당한 사실을 알았던 1985년이다.

"1985년 9월 수배중이던 남편이 구속됐어도 면회한번 못하다가 검찰로 송치되던 9월 26일 극적으로 면회를 하게 됐어요. 그런데 이가 들뜨고 어금니가 부서져 뭘 씹을 수도 없는 상태였고 제대로 걷지도 못했어요. 남편이 죽는 줄 알았죠. 그 지경에서도 남편은 제게 고문 받은 사실을 알려줬어요. 비교적 건강한 사람이었는 데 얼마나 심하게 당했으면 저지경이 됐을까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그 때 인재근 씨가 선택한 길은 좌절이 아니라 적극적인 저항이었다. 인씨는 세상에 남편의 고문사실을 알려냄으로써 군사정권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을 통해 김 의원과 함께 고통을 이겨냈고 이 것이 계기가 돼 두 부부는 87년 케네디 인권상을 함께 받기도 했다.

물론 군사정권 시대인 당시에 외국에 나가 이 상을 받는 것조차 쉬운 일은 아니었다. 수상이 확정됐을 때에도 김 의원은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인재근 씨 혼자 상을 받으러 미국으로 가야 했지만 당시 정권이 여권을 내 주지 않아 끝내 참석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다음해 5월 케네디 추모재단측에서 직접 한국으로 와 인재근씨는 어렵사리 상을 받을 수 있었고 상을 받은 지 한달 뒤에 김 의원이 가석방으로 나와 두 배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고 한다.

남편도 없는 상황에서 '여자' 혼자서 수년간 두 자녀를 키우고 운동과 집안 살림을 해내는 등 몇 사람 몫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인재근씨는 "남편이자 동지인 김 의원에 대한 믿음과 대학 때부터 다져진 운동에 대한 신념"때문이라며 "서로에 대한 믿음과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이 없었다면 이겨내기가 힘들었을 것"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1996년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부터 남편이 제도 정치권에 들어가기전보다 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한발 뒤로 물러서서 김 의원과 지역민들이 잘 지낼 수 있게 노력한다는 인재근씨는 요즘들어 김 의원을 바라보는 세상의 눈 때문에 무척이나 부담스럽다고 말한다.

지난해 언론사 정치부 기자 200명이 선정한 정직성과 언행이 일치하는 정치인으로 뽑혀 백봉신사상을 받은 김근태 의원은 한 중앙일간지가 실시한 21세기 한국정치에 영향을 미칠 인물에도 2위로 선정됐을 뿐 아니라, 98년 여성신문이 여성지도자 100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베스트 정치인 4위, 경향신문이 조사한 차세대 지도자 여론조사에서는 10위에 오르는 등 정치권에서의 비중이 점차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재근씨는 "남편에게 바라는 것은 '이왕 제도 정치권에 들어간 바에야 노력하는 실력있는 정치인'이 되었으면 하는 것" 뿐이라고 말한다.

국민들로부터 정치인이 신뢰받지 못하고 있는 요즘 김 의원만큼은 소신을 지키는 정치인이자 실력 있는 정치인으로 남아 우리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김근태 의원의 아내가 아닌 개인 인재근의 삶은 어떤 것이냐"는 질문을 던지자 "남편 뒷바라지를 하면서도 뇌성마비 어린이집에서 봉사활동을 꾸준히 해왔고 수양부모협회후원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여성운동과 인권운동도 계속 해 왔어요. 남편 뒷바라지만 한 것이 아니라 저를 위해서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죠"라고 말하는 인재근씨.

그러나 잠시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이내 "이제는 김 의원이 정치권에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만큼 앞으로의 삶은 더 적극적으로 '나' 중심으로 살고 싶다"고 묵혀놨던 속내를 보여줬다.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 온 남편의 옆에서 20여년간 묵묵히 뒷바라지를 하면서 자신의 삶 또한 놓지 않아 온 인재근씨, 작기만한 그녀의 몸 어디에서 이러한 힘이 나오는 지 그녀의 마지막 말이 귀를 맴돈다.

"희생이요? 남편을 위해 희생한 것 별로 없어요. 남편의 삶을 지켜보면서 저도 많이 컸습니다. 인재근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남편의 '고통'이 오히려 많은 도움이 됐기 때문에 희생이랄 수는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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